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김형태 / 발행인 

며칠 전 TV 뉴스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을 보도하면서 같은 영상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젊은 여성 교사가 큰 스펀지 베개를 들어 옆으로 돌리더니 서너 살 아이를 힘껏 후려치는 거였습니다. 아이는 나동그라졌지요. 저 선생 입장에서는 아이가 뭔가 문제를 일으켰기에 그랬겠지만, 참으로 동정심 없는 행동입니다. 동정심心, 상대방의 마음에 같이 하는 마음. 동정심을 뜻하는 영어‘sympathy’도‘같이 한다’는 뜻의‘sym’과‘정情’이란 뜻의 ‘pathos’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저 선생님이 아이의 마음, 입장, 정情에 같이同했더라면 차마 저리하지는 못하였겠지요.
뉴스 다음 장면은 그 교사가 아동학대죄로 구속적부심을 받는 법정 앞에서 피해 어머니들이 울면서 엄벌을 호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내 손주가 어린이집에서 저런 학대를 당했다면 나도 당연히 분개했을 겁니다. 하지만 악인을 변호하는 직업의식의 발로인지 나는 저 장면에서 어쩐지 마음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악행에 대한 벌은 법의 몫으로 맡겨 두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우리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죄를 미워하는 걸 넘어서서 사람까지 미워하다 보면 자신 역시 동정심을 잃게 되어 그 악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고.
저 뉴스 보도도 그렇습니다. 교사가 아이를 후려치는 장면을 저리도 되풀이해서 보여 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시청자들에게 자극적인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주어 시청률을 올리려는 이기적인 의도로 읽혀졌습니다. 이기심利己心은 동정심의 반대이지요.
언제부턴가 우리는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어내 집단적으로 매도하고 단죄하는 데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우리는 아무 흠이 없나? ‘한 오백년’이란 노래 가사는 이제 내 탄식이 되었습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 살겠네”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으면서 바로 잡아주지 못하고, 사회가 선생의 어린 짓에 대해 엄벌만을 외쳐대고, 매스컴이 이를 자기 장사에 이용하는 식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선순환이 아닌 악순환.
우리는 성인을 떠받들고 악인을 욕합니다. 하지만 어디 성인이나 악인이나 제 선택으로 그런 성품을 타고난 건가요. 조상들로부터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거고, 세상에 나온 후 교육과 주변 환경이 여기에 더해져서 성인과 악인의 길을 간 거지요. 누군가를 성인이라 떠받들고 악인이라고 저주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잠시 동안 그를 만들어낸 조상들의 ‘유전자’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겠지요.
2년 전 끔찍한 살인범을 대리해서 사형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온 젊은이였는데 여러 망상에 시달리다가‘내면에서 들려오는 어떤 명령’에 따라 어머니를 잔인하게 죽이고, 도망가는 아버지도 안방까지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이 패륜아를 저주하는 대신, 또 다른 살인인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이 헌법재판을 시작한 겁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기에 그리 한 것이지요.
힌두교 경전 < 바가바드 기타 >는 사람들이 구원받으려면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길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흠 많고 유한한 우리가 사실은 흠 없는 ‘절대’의 변전變轉이라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인이건 악인이건 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잘 알아 깨닫는 ‘지혜’의 길. 행위의 결과를 얻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행위 자체를 하는 ‘내버림’의 길. 신과 이웃에게 철저히 자신을 바치는 ‘헌신’의 길.
이제 우리는 ‘나’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사회 전체가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미움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인이나 성인이나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걸 참으로 깨달아 알 일이요, 그래서 죄는 미워해도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 동정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통하여 오시는 예수님

-공동선을 열며 / 김형태 / 발행인 

세밑에 존경하는 신부님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서품 40년이 훌쩍 넘었는데 부활, 성탄미사를 못 한 건 생전 처음입니다. 사방이 온통 어둡고 뒤숭숭해서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환한 새해를 맞는 건 그냥 꿈이겠지요?’
당신 말씀마따나 정말 사방이 온통 어둡고 뒤숭숭합니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온 세상이 아우성이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난은 그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탐진치貪瞋痴’, 욕심과 어리석음, 성냄은 코로나보다 더 무섭습니다.
엊그제 TV를 보니 감옥에서 나온 조두순 집밖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가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더군요. 창문에 돌을 던지고, 가스 배관을 타고 위로 올라가고, 차 위에 서서 발을 구르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짜장면을 시켜먹고. 저 사람들이 왜 저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유튜브 방송을 하는 이들이라는 겁니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니까 저런 행동도 서슴치 않는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디 저들만 그런가요.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내 친구 하나는 무슨 사정이 생겨 아파트를 6억원에 팔고 전세로 이사를 갔는데 팔아버린 아파트값이 불과 4년만에 18억원, 3배로 올라 그 처가 너무 속이 상해 몸져누웠다는군요. 이런 집값 폭등을 놓고 사람들은 말하기가 쉬워서 장관이며 대통령 탓을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 생각해 보면 집값을 그렇게 올린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정부가 오랜 세월 온갖 규제책을 다 내놓아도 귀신같이 이를 피해 부동산 투기를 합니다. 모두가 내 집 값 오르기만 바랍니다. 자기가 그래 놓고 애꿎은 남 탓을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문자 그대로 ‘탐진치’라. 우리의 욕심이요, 어리석음이요, 성냄이지요.
요즈음 일부에서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국회를 향해 의회독재라고 목청을 높입니다. 독재?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하던 유신시절, 내 친구들은 이건 아니라고 말 몇 마디 하기도 전에 학교 안에 득실거리던 사복경찰들에게 붙들려 감옥에 갔더랬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대통령이며 국회를 향해 독재라고 욕을 하고 막말을 해도 아무도 잡혀가지 않습니다. 사실 공수처 설치는 과거 여야 모두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제도입니다.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 공수처를 두자는 거였는데 공수처가 또다시 지금 검찰처럼 권한을 남용할 위험성은 남아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수사는 경찰이, 기소는 검찰이 하도록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지면 결국은 없어져야 할 제도입니다. 이런 과도기적 공수처를 두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국회에서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국회 다수결을 독재라고 딱지 붙이고 언론이 이를 확산시켜 사람들을 극한대립으로 몰아가는 것 역시 욕심과 어리석음, 성냄의 소치입니다.
그런데 저 옛날, 2천 5백년 전 플라톤도 이미 같은 탄식을 했더군요. 과두제 정치를 해보니 사람들이 지혜와 정의는 내팽개치고 이윤을 남기고 재화를 모으는 데만 전념한다고. 민주정에서는 방종과 와해가 만연하고, 참주제에서는 순종하는 군중을 거느린 영도자가 동족을 무참히 억압한다고.
예수님 시절에도 그랬지요. 유다의 정치, 종교 기득권층은 물론, 당신을 따른다고 나선 제자들조차도 하늘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모두 모두가 다 욕심 많고 어리석고 화 잘 내는 세상이었더랬지요. 당신께서는 그런, 사방이 온통 어둡고 뒤숭숭한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으시고 자그만 사랑의 겨자씨 하나 심으셨지요. 그리하면 십자가에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셨지요.
신부님은 성탄 축하 메일 말미에 저에게 이리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환한 새해를 맞는 건 그냥 꿈이겠지요?” 신부님은 답을 아시면서 물으신 겝니다. 신부님과 제가 예수님 가신 길을 제대로 따라가면 우리를 통해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거라고. 그래서 환한 새해가 밝을 거라고.

_다 함께 사는 공동선

낙태죄_ 자기결정권인가, 생명권인가?

대화_
고경심: 문산보건지소 산부인과 과장,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사
백소영: 강남대학교 기독학과 초빙교수
박태식(사회):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학장

박태식: 공동선 156호 2021년 신년호에 실릴 오늘 대화의 주제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개정이 되지 않으면 자동 폐지가 되는 낙태죄에 관한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입장이 나뉘는데, 대체로 여성계에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며 낙태를 허용하자는 입장이며,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계에서는 태아를 포함한 사람의 생명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낙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참석 하신 선생님들 자기소개 간단히 먼저하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겠습니다. 저는 성공회 신부로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신약성서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경심: 저는 서울대학교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를 거쳐 단국대학교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일하다 산부인과를 개원해 15년 정도 일했습니다. 지금은 문산보건지소 산부인과에서 일하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헌법 재판소에서 의료인으로서 낙태죄에 관해 참고인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백소영: 안녕하세요? 저는 기독교 사회윤리를 전공 했고 지금은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태식: 요즈음 낙태가 중요한 이슈인데 먼저 고경심 선생님 의학적으로 낙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해주시죠.
고경심: 임신을 중지하는 방법에는 약물과, 수술을 통한 방법이 있습니다. 임신 초기에는 약물요법으로, 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프로제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필요한데 “미페프리스톤”이라는 약물을 복용하면 태반과 자궁사이의 혈액순환이 차단되면서 더 이상 임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미페프리스톤’이라는 약물이 허가되어 있지 않은데 최근 보건복지부에서 허가를 내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통한 방법으로는 음압을 이용해서 자궁 경부에 관을 넣어서 석션Suction(병원에서 수술 등의 행위를 할 때 흡입해주는 기계)을 통해서 내용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합니다.
하지만 10주, 11주가 지나면 자궁 경부를 넓히는 약품을 넣습니다. 그리고 4시간~6시간 후에 큐렛이라는 기구를 넣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밖으로 배출시키는 방법으로 수술을 합니다. 그리고 14주에서 28주 사이는 자궁의 진통을 유발하는 약을 써서 진통이 유발되면 자궁이 수축되는데 그렇게 수축되면서 자궁문이 열리고 그러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밖으로 배출시키는 방법으로 수술합니다.
박태식: 수술하실 때 동의를 얻는 거죠?
고경심: 대부분의 수술이 사실 지금까지는 불법이었지만 대부분은 여성의 요청에 의해서 했던 겁니다.
박태식: 의사가 낙태를 돕는 행위를 하면 처벌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고경심: 형법상 낙태죄 제1항은 임신한 여성의 낙태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낙태죄 제2항은 낙태를 도운 의료인(의료인에는 의사, 약사, 조산원 등)이 낙태를 시행하거나, 하도록 도우면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지금의 낙태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합니다. 그리고 벌금형이 없고, 징역형입니다. 그러니까 형평성도 어긋날뿐더러 의료행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사들도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물론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의사그룹도 있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여성의 요청에 의해서, 그리고 할 수 있으니깐 해왔던 것입니다.
박태식: 낙태죄에 대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낙태죄를 대중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는 장이 되게 한 것은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낙태와 관련한 법과 정책, 그리고 논의가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백소영 선생님이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백소영: 낙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시에 포함된 조항입니다. 물론 일제日製를 가져온 겁니다. 1973년도에 정부에서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아래 산아제한정책으로 볼 수 있는 모자 보건법이 제정되면서 인공임신중절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여성을 주체로 인정해 주었다기보다는, 정권이 원치 않는 부류의 태아들에 대한 탄압이었다고 봅니다. 모자보건법을 보면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나 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간의 임신, 엄마의 건강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의 6가지 조항의 경우에는 낙태가 가능하고, 낙태죄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법을 만든 겁니다.
여기에 대해 기독교는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수의 여성신학자들이 여성신학 포럼에서 여성의 주체성, 자기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등을 캠퍼스 안에서만 논의하는 정도였습니다. 낙태죄는 임산부 못지않게 산부인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오랜 고민거리로 2010년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모임인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수술을 한 의사와 병원을 고발하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신중절 시술을 했다가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 정아무개씨가 2017년 2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이 헌법소원이 2019년 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어진 겁니다. 이 헌법불합치 결정 자체가 여성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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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다 함께 사는 공동선

의정부 ‘길서낭’ 의 죽음을 위한 진혼곡鎭魂曲

혜문 / 문화제제자리찾기 대표

1.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신비한 체험은 의정부 고산동 갓바위 마을의 ‘길서낭’ 이었다. 10살 무렵의 어느 저녁, 어둠이 이제 막 깔리기 시작한 시골길을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1Km 정도 떨어진 옆동네로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검푸른 저녁 무렵이 주위를 휘감는 언덕을 오르며 할머니는 ‘길서낭’을 가르치면서 말했다.
“저게 서낭당 나무란다. 이 동네를 지키는 나무인데 무척 오래됐데, 한 500년쯤?”
500년이란 말에 놀라 나는 유심히 그 나무를 보았다. ‘길서낭’은 주위에 사람들이 켜놓은 촛불들로 발갛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몸통에는 오색천으로 몸을 감은 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떨고 있었다. 뭔가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전설의 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서낭당을 베었다가 ‘동티’가 나서 죽었다는 어떤 사람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고, 산신령이 나무속에서 숨어 있다가 ‘어흥’하고 놀래 키며 튀어 나올 것 같았다. 할머니는 길서낭을 향해 손을 모아 부비며 인사하며 뭔가 웅얼웅얼 하며 기도를 했다.
“아유 그저 서낭님 우리 손주 새끼 그저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라도록 보살펴 주시고…”
그 뒤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길서낭의 촛불, 오색천, 그리고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막히던 느낌이 무서웠기에, 할머니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서낭당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위에 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2.
누구나 어른이 되면서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길서낭에 대한 기억은 그 뒤론 특별히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어쩌다 고향마을의 선산에 성묘를 갈 때면, 길서낭을 지나며 한번쯤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25살에 출가해 부처님께 귀의해서 20년을 승려로 살았기에, 고향마을에 가볼 일도 사실 크게 없었다.
지난 가을 추석 무렵 친척들과 성묘를 갔다. 돌아가신 조상 무덤에 친척들이 모여 벌초를 한다는 연락을 받아 오랜만에 고향마을을 찾게 되었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길서낭’이 보고 싶어져 찾아보았다. 고향에 갈 때면 언제나 길목에 서서 반겨 주듯이 맞아 주던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까닭이었다.

길서낭이 서 있던 곳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주변이 아파트 부지로 개발되면서 길서낭 자리에 도로가 크게 나 있었다. 나는 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서낭은 원래 자리에서 쫓겨나 도로가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몸통에 ‘색동저고리’ 같은 오색천을 여전히 두르고는 있었지만,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있었고 생기가 없었다.
‘아! 죽었구나’
순간 먹먹한 슬픔이 북받치듯 올라왔다. 옮겨진 길서낭 앞에는 비닐 천막이 처 있었고 무속인으로 보인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분들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갓바위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길서낭 자리가 도로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이 길서낭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력히 항의해서 ‘의정부시’는 길서낭을 도로 사이에 두고 길을 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방심하고 있었던 사이 아파트 공사를 위해 큰 차량이 진입하면서 그만 길서낭을 들이 받았다. 길서낭은 큰 가지와 몸통이 부러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러자 ‘의정부시’와 ‘공사업체’가 나무를 뽑아 도로 옆으로 이식하고, 원래 자리는 도로를 내어 버렸다고 한다. 무속인들은 비록 고사했지만 영험한 길서낭의 몸통이라도 지키기 위해 비닐천막을 치고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아 길서낭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구나!’
뭔가 알 수 없는 미안함으로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슬펐다.
3.
아무리 생각해도 길서낭의 죽음을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길서낭의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의정부시는 왜 거기에 도로를 낼 수밖에 없었을까? 조금만 옆으로 했다면 길서낭을 지킬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의정부시가 길서낭을 왜 ‘보호수’로 지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길서낭은 의정부시에 최근까지 남아 있었던 유일한 성황당 나무였고, 수령도 구전에 의하면 수백 년이 넘었으므로 ‘보호수 지정요건’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길서낭이 보호수로 지정되면, 아파트를 못 지을까봐 도로를 못 낼까봐 일부러 지정하지 않은 걸까? 이런 저런 의문이 꼬리를 물면서 나는 급기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길서낭’ 파괴사건을 탐문 조사해 보았다. 관련 자료를 보다가 나는 ‘길서낭’ 사고를 보도한 기사에서 ‘사고당시의 CCTV’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CCTV 사진을 보면 대형 트럭이 길서낭 쪽으로 진입하는데, 분명히 트럭이 통과할 수 없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돌진해서 길서낭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었다. 고의가 의심될 만큼 이상한 장면이었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쩌면 길서낭을 제거하고 아파트 도로를 넓게 내려는 ‘불순한 의도’들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가운데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길서낭 사건을 계기로 나는 의정부시의 개발과정에서 파괴되는 문화재들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진행해 보았다.
최근 수년간 의정부시에서 파괴된 문화재들은 길서낭 뿐만이 아니었다. 2017년 의정부시 호원동에 있던 고인돌은 ‘실내테니스장 건립 과정’에서 발파되었고, 녹양동에 있던 청동기 유적 ‘선돌’은 최근 분실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도시개발에 관심을 집중하다보니 문화재나 유적에 대한 소홀함이 불러온 ‘참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비단 의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들이 모두 그런 이유로 파괴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떠난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들이 있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은 선산이 자리 잡은 시골 고향집과 언제라도 불쑥 찾아가면 두 팔 활짝 벌려 안아주던 할머니가 있었다. 지금 세대는 불행하게도 고향이 없다. 어른이 되어 다시 고향을 찾은 아이들을 나무람 없이 안아주던 것들은 더 이상 세상에 없다. 아파트가 세워지고 자동차가 씽씽 달리게 된 고향 마을은 정겨운 것들이 하나도 없다. 할머니도 고향집도 다 떠나고, 수백 년간 마을을 지키던 길서낭도 세상을 떠났다. 길서낭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이다. 나는 그 헛헛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갓바위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길서낭’을 위한 진혼곡과 얼굴을 기록으로 남긴다.

_미술로 보는 성녀의 전설과 사실

막달레나 숭배: 남프랑스 전설과 사실

이은기 / 목원대학교 미술교욱과 명예교수. 지은 책으로 < 욕망하는 중세 >, <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 > 등 다수가 있다.

지난 호의 < 마리아 막달레나: 참회한 창녀? >에서 막달레나가 창녀였다는 전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아보았다. 물론 사실이 아니고 중세 금욕주의 속에 숨어있는 에로티시즘의 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까지 인정한, 사실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전설이다.

예수 사후의 막달레나 전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으나 막달레나는 십자가 아래를 지켰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는 첫 번째로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다. 정원사의 모습으로. 그리고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그녀를 ‘사도들의 사도’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막달레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 다른 전설이 펼쳐진다. 13세기에 쓰여진 『황금전설』은 그녀의 이후 생애를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간단히 줄여도 다소 긴 내용이다.

막달레나는 예수의 72사도 중 한 명인 성 막시미누스Saint Maximinus에게 맡겨져서 마르타와 나자로와 그 외 사람들과 함께 전도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떠났다. 배는 방향키도 없고 돛도 없었지만 기적적으로 프랑스 남쪽의 마르세이유Marseille항구에 도착했다. 잘 곳이 없자 이교도 신전, 즉 그리스 신전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이교도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조용한 태도와 현명한 말로”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우아함에 경탄했다. 막달레나는 왕과 왕비도 개종시키고자 노력하였는데 왕은 막달레나에게 자기 부부가 아기를 갖게 해준다면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막달레나는 간곡히 기도하였고 왕비는 곧 임신하게 되었다. 왕은 막달레나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진짜인지 확인하겠다고 사도 베드로를 찾아 왕비와 함께 배를 타고 로마로 출발했다.

배는 풍랑을 만났고, 왕비는 예정보다 빨리 아기를 낳았다. 왕비는 죽고, 아기는 죽은 엄마의 젖을 빨았다. 왕은 슬펐으나 뱃사람들이 소리 지르자 풍랑을 잠재우기 위하여 죽은 왕비와 아기를 바다에 빠뜨리고 배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잠시 후 한 줄기 햇빛이 언덕을 비춰 그곳을 보니 죽은 왕비와 젖을 빨고 있는 아기가 있었다. 뱃사람에게 간청하여 배를 돌려 왕은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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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부분 원고는  생략

지성용 신부의 세상 발걸음

2021년 새해를 시작하며
-바벨탑에서 성령강림까지의 소통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느님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기(11장)의 바벨탑 이야기다. 저자는 언어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 상황에서 ‘바벨탑’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들은 키루스의 칙령으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국에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한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이며, 그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돈이란 뜻이다.
2020년 ‘코로나19’ 이전까지 세계는 ‘초연결사회’를 지향하며 4차 산업혁명, 네트워크의 혁명을 이야기했다. 초연결hyper-connected사회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이며, 이미 우리 이런 ‘초연결사회’로 진입해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는 모든 사물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사람과 연결되는 사회를 지향했다. 초연결사회는 사물 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을 기반으로 구현되며,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증강 현실AR같은 서비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은 바벨탑 시대의 하나의 언어를 이루기 위한 연결을 끊임없이 치열하게 시도하고 있었다. 모두 돈의 힘이었다. ‘돈’, 더 정확하게는 ‘이윤’이라는 자본의 속성이 ‘인간’을 치밀하게 계산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연결과 빅데이터는 상품의 판로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신부이며 현재 < 인하대학교 > 일반대학원 인문융합치료 전공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마스크, 비대면, 언텍,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를 쓰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이전에는 마스크를 쓰면 뭔가 불량해 보이고, ‘뭐를 숨기려고 저럴까?’ ‘어디 아픈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 뉴스 안보나?’ ‘도무지 교양이란 없는 사람이군’이라며 뒤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의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약속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제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단어가 부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그래도 불편했던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도 이면裏面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내시고 거기에 ‘숨’(루아흐)을 불어 넣으시어 인간을 창조하신다. ‘숨’은 인간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숨’이라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신약성경에서는 희랍어 ‘프네우마πνεύμα, Pneuma, Spirit’로 번역되기도 했다. 숨은 ‘들숨’과 ‘날숨’으로 구성된다. 들숨은 주위 환경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산소 21%, 질소 78%, 이산화탄소 0.03%, 수증기 및 기타 성분이 0.97% 함유되어 있다. 들숨 속에 포함된 21%의 산소는 우리 몸에서 5% 정도 사용되고 날숨으로 16%를 다시 내보낸다. 날숨은 산소 16%, 이산화탄소 4%, 질소 78%, 수증기 및 기타 성분 2%로 구성되어 있다. 호흡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지만 들숨으로 들어온 21%의 산소를 다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5% 만을 사용하고 16%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며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평평하게 고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스크의 등장으로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상당히 많은 ‘숨’이 세상과 교류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상황에 마주한 것이다. 내 안으로 숨‘in(안으로)+spiriatio(숨)’이 돌아오니, 나는 ‘내ego’ 안에서 계속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마주하기 어려웠던 ‘혼자’를 체험한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줄 알았는데 ‘혼자’할 수 있는 것들에 많은 한계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마스크는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게 한다. ‘페르소나persona’는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원래 페르소나는 그리스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다.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라고 말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동안 인간은 이러한 자신이 만든 ‘페르소나’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만들어 왔지만, 이제 인위적인 ‘페르소나’는 다시 한 번 덧 쓰인 마스크에 의해 차단당한다. 곧 천 개의 가면이 무력해 지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입과 얼굴의 근육 등 소통의 80%가량을 차지한다는 ‘비언어적non verbal 요소’들의 상당 부분을 차단당하면서 인간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신에게 더 진실해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뒷 부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