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은  

 잡지 『공동선』은 지난 1993년 가톨릭을 중심으로 창간되었고, 2000년에 들어서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주요 종교기관이 추구하는 공통의 관심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뭇 생명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화해보다는 반목, 평화보다는 갈등의 지렛대 구실을 해온 게 현실입니다. 이에 따라 『공동선』은 종교간 이해의 벽을 뛰어넘고, 형식적 교리의 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합니다. 

공동의 가치인 생명의 화해와 평화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와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명사적 차원의 대안을 모색해왔습니다. 아울러 파편화된 개인을 넘어서 생명의 가치를 다 함께 추구하는 협동적 공동체 문화를 뿌리내리고자 합니다. 

 공동선은 종파를 초월해서 종교인과 일반인이 함께 만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범종교적, 범시민적 공동체 잡지로 자리매김하겠습니다.

공동선은 

.1993년 11/12월 창간_1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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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9/10 100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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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02 150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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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04월 
현재 157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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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원? 하느님 나라 건설!

공항 입국장에서는 누구나 영화 주인공이 됩니다. 마중 나간 이들은 이제나저제나 눈이 빠지게 출구를 바라보지요. 그러다 기다리던 가족이나 친구, 그리운 님이 나타나면, 수줍은 이들은 멀찍이서 손을 흔들고 또 어떤 이들은 달려가 얼싸안기도 합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흐믓한 풍경입니다.
얼마 전 외국 사는 외손주 녀석이 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공항은 괴괴하더군요. 출구를 빠져나온 땅꼬마 녀석은 예년 같으면 “할아버지”하고 달려와 안겼을 터인데 이번에는 내가 안아주려고 달려가도 오히려 요리조리 피해 달아나는 거였습니다. “아니 요 녀석이?” “할아버지, 저 만지면 안되요. 저 열 밤 동안 할아버지하고 떨어져 있어야 해요.” 그래, 여섯 살짜리 네가 하느님 까불지 말라는 전 아무개 목사보다 낫구나.
하루는 녀석이 방바닥에 붙은 날벌레를 손바닥으로 탁쳐서 잡길래 “야, 쟤도 살고 싶지 않겠냐, 살아있는 목숨은 죽이지 마라.” 부처님 말씀을 읊었더니 녀석은 그럼 사람을 죽인 악당도 살려줘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당근이지.” 말하기가 쉬워서 손주 녀석에게 척척 모범답안을 가르쳐 줬지만 사실 나 자신은 그리 못하고 있지요. 전 아무개 목사가 남 생각 안하고 사람들 끌어 모아 정치집회 열다가 코로나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슬며시 못된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그 거 참 쌤통이다. 그래, 당신이 코로나로 엄청 고생을 해야 당신 신도들이 제 정신을 차릴 거야.’
엊그제 아침. 마당 한구석 수세미 넝쿨 거미줄 앞에서 직박구리 새가 한참을 제자리에서 날더니 커다란 연두색 거미를 낚아채서 날아갔습니다. “저 못된 새 잡아서 구워 먹어야겠다.” “할아버지, 그건 좀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목숨 죽이면 안 된다면서요.” “저 새는 거미를 먹어야 사는데 거미를 살리려면 새를 죽여야지.” “할아버지, 그럼 저 새를 집안에 데리고 가서 우리가 먹을 걸 주면 되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졸지에 이른 아침 우리 집 마당은 60년 가까이 나이 차 나는 손주와 할비 사이에 이 고된 세상사를 논하는 도량道場이 되었습니다. 돼지며 쌀알이며 남을 먹어야 살고, 남하고 경쟁해서 이겨야 좋은 자리 시집 장가도 가고 직장도 얻는 이 무정한 세상에서, 그래, 부디 어른이 되어서도 그 마음 잘 간직하거라. 녀석은 이제 인생 고민의 시작이고 나는 60여년 세월 해온 그 고민의 답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자리에 왔습니다.

김형태 / < 공동선 > 발행인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의 답을 찾으려고 종교에 귀의합니다. 나는 어찌해야 이 유한한 세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이 개체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걸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 하고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해탈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개체 ‘나의 구원’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남을 ‘나보다 더’는 아니라도 ‘나만큼’은 사랑하는 일.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잘 아시고 하느님 나라를 자그마한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겨자씨를 세상에 뿌려 하느님 나라가 뭇 사람들을 품을 만큼 큰 나무가 되게 하려고 애쓰다가 종래에는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거꾸로 오로지 이 개체 ‘나’의 구원에만 목을 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그걸 입으로 고백하면 이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마술 주문을 반복합니다. 코로나에 이웃들이 희생되든 말든 열심히 나의 구원에만 매진하는 저 전 아무개 목사나 그를 따르는 불쌍한 우리 형제들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꼬 8, 34)하셨는데, 오로지 나, 나, 나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이는 그 정반대 길을 가는 거겠지요.
우리 집 지하실 거미줄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걸렸는데 놀랍게도 같이 있던 다른 귀뚜라미 하나가 친구를 구하려는 건지 제 목숨 걸고 거미줄로 뛰어들더군요. 그저 숨죽이고 이걸 지켜보기만 하는 녀석들도 있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