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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122호【대화】『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 』 - 편집부 -
<<대화>>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 

사회: 류상태 _ 종교작가
패널: 조광호 신부 _ 인천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 교수, 가톨릭조형연구소 대표
        김재성 _ 마하보디 명상심리대학원 교수

류상태: 오늘 대화의 주제는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으
로 모든 게 끝이라 생각해서 사망死亡이라고 표현하죠. 죽음 이후의 세계를 개신교에서
는 천국과 지옥, 극단적으로 흑백 논리적인데 비해 가톨릭에서는 중간에 연옥이 있어 소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윤회와 연기를 주요 교리로 인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하나의 과정으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주장
하는 분들이 있어요. <죽음학회>라고 죽음과 죽음 이후의 관계를 의학적, 과학적으로 연
구하는 분들입니다. 우선 연기, 윤회, 환생의 개념을 정리해 보죠.

김재성: 우선 연기는 일정한 조건 아래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연기를 법칙으로 말
하면 조건에 의해서 현상이 생겨나는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지요. 십이연기로
도 얘기하고 좀 더 복잡하게는 24가지 조건이 있어서 어떤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
들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불교에 있었는데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살
고 있는 우리들의 삶도 밝히고 지금 현재 우리가 새롭게 만드는 조건이 다음순간, 미래, 
다음 생이나 먼 후생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이게 윤회하고 연결되는 연기입니다. 환생이
라는 의미는 지금 내가 죽어서 다른 누군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 어떤 자아가 있어서 태어
남을 반복하는 것을 환생이라고 하는데 불교도 환생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정된 
자아, 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것이 있어서 옷이 낡으면 옷만 갈아입듯이 삶을 반복한다는 
개념을 불교는 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유사하게 보일 수는 있습니다. 연기에 의
해서 생사는 반복하는 하나의 단위는 뭐냐 하면 정신과 물질 즉 오온五蘊이라고 하고 색
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서의 정신과 물질이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고 또 다른 조건이 있
으면 다시 생겨나고 조건이 없으면 더 이상 윤회하는 삶은 반복하지 않고, 조건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의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아라한이나 완전한 부처가 되었을 때 이런 분들
은 새로운 조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윤회하는 세계 내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
죠. 윤회하는 세계는 불교는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나눕니다. 욕망의 세계가 11가지 
단계가 있고 색계가 16가지가 있고 무색계가 4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세계 위로 올라가면 
천상세계가 약 26단계로 나뉩니다. 인간은 밑으로 4가지 세계가 있고 인간이 서열로 보면 
밑에서 5번째고 인간 위로 엄청난 천상세계가 존재하는데 이 세계 안에서 생을 반복하는 
것이 윤회이지만 생을 반복한다고 해서 고정된 영혼이나 자아가 있어서 윤회한다고 하는 
것은 힌두교나 자이나교로 힌두교는 아트만과 같은 영혼이 있고 자이나교도 지바라고 하
는 영혼의 원리가 있어서 그것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불교는 그런 영혼을 설정
하지 않으면서도 윤회하는 흐름 자체를 정신물질의 결합체가 조건이 있을 때 새롭게 연결
되어 윤회한다고 얘기합니다.

류상태: 그러니까 연기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 전체를 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근본 원
리 같은 거라고 한다면 그 근본, 연기라고 하는 법칙과 원리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이는 현
상 그걸 윤회라고 볼 수 있나요?

김재성: 의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생명체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고 세
계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을 윤회라고 하진 않습니다. 세계 자체는 연기법에 의해서 
그 자체가 생겨나고 머물고 파괴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겪구요. 당연히 물질이 형성되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이 테이블도 조건이 있어서 만들어졌고, 일정기간동안 유지
되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되겠죠. 영원한 물질도 없는 것이고.

류상태: 기독교에서도 윤회와 환생에 대한 가르침이 있나요? 공식적으로 그리스도 교회에
서 인정하는 부분이 혹 있는지, 있다면 어떤 건지 만약에 인정하지 않는다면 비공식적인 
견해들은 있는지요.

조광호: 기독교에서는 생명체가 죽고 난 다음에 환생하거나 윤회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
습니다. 우선 우리의 삶이 현세의 삶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이
고, 둘째로 하느님의 세계에서 하느님과 만남으로 영속적으로 삶을 유지한다고 보는 거
죠. 불교의 윤회처럼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닌 거죠. 떼이야르 드 샤르뎅
은 사람이 전인적으로 완성되는 지점을 향해서 나가는데 그 지점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얘
기해요. 그러니까 이 세계 전체가 어떤 완성의 단계를 목적 지향적으로 끊임없이 가는 거
죠. 
그리고 가톨릭에서 연옥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형성된 것은 아녜요. 연옥이 교리로 선포
된 것은 중세 이후죠. 단테의 신곡에서 연옥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오는데 여기에서의 연
옥은 천국과 자옥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purifying하는 과정으로 보
는 거죠. 시간과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상태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순 없잖습니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
가 있는 거죠. 

류상태: 그러니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르겠지만 죽음을 종말이 아니라 과정으로 본다
는 것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거죠? 

조광호: 불교에서는 도솔천에서 보살행을 하다가 지상에 내려와서 붓다가 되시는 거죠. 
기독교에선 하느님을 만나는 세계에서는 내 껍데기와 영혼만이 아니라 나의 페르소나, 나
의 모든 것이 새로운 차원의 내 인격체로 하느님과 대면하면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거죠. 
이걸 우리가 믿는 거죠. 증명해 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거죠.

류상태: 윤회가 힌두교와 불교의 주요사상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대시대부터 서구
세계에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김재성: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나 많은 서양의 철학자들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붓다와 비슷한 시대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없
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소카왕이 그리스까지 포교사
들을 파견했다는 것이죠. 기원전 15세기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죽음의 세계로 간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신화 속에서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인도에서는 기원전 7세기, 6세기 
경 힌두교 우파니샤드사상에서 윤회사상이 구체화됩니다. 이후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윤
회하는 게 아니라 아트만은 없는데 존재 세계 내에서 주위 환경과 다른 존재들과 함께 아
직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조건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
을 하면서 윤회한다고 보는 거죠. 불교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이 무아無我와 윤회입니
다. 고정된 자아, 영혼은 없지만, 말씀하신 페르소나는 없지만 이게 윤회를 반복한다고 합
니다. 불교에서 볼 때 영혼을 해체해 보면 정신물질의 복합체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자아
라고 이름을 붙일 순 있으나 자아는 개념에 불과한 것이지, 실재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오온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것에 의해서 윤회를 얘기하는 것이지, 붓다와 아라한들처럼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류상태: 그럼 힌두교에서는 각자에게 있는 아트만이 윤회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이나교에선 각자에게 있는 생명의 원리가 윤회를 하는 건데 불교는 그거 자체가 없다
는 거죠. 변하지 않는 게 없으니까. 무아無我와 무상無常, 그러면 심정적으로 힌두교에 동
의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김재성: 당연히 기독교와 힌두교는 많이 닮았죠. 제가 봐도 힌두교가 범신론적 입장을 취
하고 있지만 브라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는 
측면이 있잖아요? 

류상태: 그럴 수 있겠네요. 불교의 입장에서는 거의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궁극적
인 실제와 합일되는 그걸 하나의 구원으로 보는 과정이 힌두교라던가 기독교가 같은 맥락
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조광호: 요즘 가톨릭 안에서도 그런 문제들이 제기되는데, 사도신경을 보면 “육신의 부활
을 믿으며.” 이렇게 나오거든요.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하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그럼, 몸뚱아리 부활을 믿는 거냐? 그럼 그것이 윤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거든요. 그
런데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자들이 판을 칠 때였어요. 영지주의자들
은 철저한 이원론자들로 육체는 껍데기이며 영혼만이 참 자아로 인정했어요. 그래서 그들
은 예수조차도 부인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영지주의자들이 자꾸 영혼만 얘기하니까 “육
신의 부활을 믿으며”를 강조하게 된 거죠.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보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누구는 “젊은 청춘으로 부활한다.” 어떤 목사님은 “화장火葬을 하면 안된다.”라고 합니
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라는 하나의 각자의 독립적인 존재, 페르소나가 없어지
지 않는다는 거죠. 

류상태: 나쁘게 말하면 영원한 나에 대한 욕심이고, 좋게 말하면 존재에 대한 애착이 어
느 종교에나 있는데 불교는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김재성: 단계적으로 부정합니다. 일단은 인정해줍니다. 사람들이 그걸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단은 괜찮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지는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죠. 이것을 유애
有愛라고 합니다. 존재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거죠. 사실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죠. 그
건 종교 자체가 갖고 있는 기본 모티브일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영원히 살고 싶은데, 불
교에서는 마음이 열반을 경험하면 그 열반은 영원하다, 하지만 나라는 고정된 자아라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기독교의 입장으로 보면 결국 페르소나가 하느님과 함께 한
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불교는 철저하게 그 면을 배제하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류상태: 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실체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보는 것이지
요?

김재성: 열반의 영원성은 인정합니다. 열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거든요. 내가 아니라 마
음이 경험하는데 조건화된 마음에서 조건화를 벗어나 버린 마음이 열반을 경험을 해요. 
근데 그 열반을 경험하면 그 열반과 일치가 되는 거예요. 

류상태: 일치라기보다는 분해되고 차라리 흡수됐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김재성: 열반의 가능성을 가진 마음이 열반에 이를 수 없는 요소들이 탈락되면서 열반에 
이른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마지막 경험이 될 때 그때가 되면 자아
니 뭐니 관념이 다 떨어져 나가고 열반의 경험만 있다고 얘기해요. 열반의 경험을 부정하
진 않습니다. 아까 목적 지향적이라고 할 때 불교는 열반을 최고의 목적으로 두고 있죠. 
근데 이것은 무화無化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이 산다는 것도 둘 다 틀렸다고 말을 해요. 열
반의 속성은 영원하지만 이것을 기존의 힌두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성과는 또 다른 
각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류상태: 그럼 요즘에는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을 하던데 그게 맞는 표현인가요?

김재성: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텅 비었다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
을 얘기하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모든 현상을 색 뿐만 아니라 
색은 물질이지만 수상행식이라는 정신도 다 텅 비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러나 공은 
바로 색수상행식이다, 그렇게 공하기 때문에 본체로서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게 충만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광호: 불교에서 공이나 노자에서 공은 그냥 허무vaccum이거나 없다無가 아닌 아직 채
워지지 않은 상태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거죠. 이 점이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과 공통점이 있어요. 오히려 부활의 삶은 이 시대에 충만해 
있는 거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이란 표현도 삶과 죽음이 동시에 내 안
에 있어 내가 삶과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거지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없애고 사랑하고 
나누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류상태: 영혼이나 아트만도 윤회의 주체가 아니라면 도대체 윤회의 주체가 뭔지요?

김재성: 정신과 물질의 결합체인데 정신적인 것이 윤회의 원동력이 됩니다. 물질은 정신
에 의해서 같이 형성될 때 고정되는 것이고, 정신활동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
가 오늘 아침의 마음 지금 마음 다음 순간의 마음이 계속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는 대
로 듣는 대로 변하고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들이 있습니다. 이
것들이 결합된 것이 조건적으로 새로운 마음과 마음 작용들을 찰나생 찰나멸한다고 그래
요. 순간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연결되어가면서 흘러가는 것, 흐름으로 얘기하죠. 
예컨대 태어나서 지금 나이가 50될 때까지 제 자신을 어느 시기에 저를, 저라고 하겠어
요? 지금 이순간만 저라고 한다면 또 10년 후에 이순간은 고정되어 있어요. 저의 생이 지
나오면서 뭔가 연결되는 고리가 있다는 그것이 조건론입니다. 조건 지어진 것들이 새로
운 것들을 만들어 내고 또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이 또 조건화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흘러
가고 있는 거죠. 단지 조건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을 때 흐름이 끊어진 열반의 경험에 들
어간다고 얘기하죠.

류상태: 변하지 않는 나는 없다는 그런 말씀이시겠네요?

김재성: 네,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얘기 하죠. 

류상태: 결국 나라는 게 없는 거네요?

김재성: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나라고 이름 붙여놓을만한 정신과 물질의 흐름이 있
는 거죠. 그것을 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가 뭐냐? 머리카락 숭숭 빠지는 지금의 
모습이 나냐? 아니면 어렸을 때 예쁘게 생긴 그 모습이 나냐? 이렇게 보면 내가 변화하고 
있는 거죠. 불교에서는 마음이 물질보다 열일곱 배 빨리 변한다고 합니다. 물질이 한번 변
할 때 마음은 열일곱 번의 변화가 있답니다. 존재는 있습니다. 다만 이 존재가 끊임없이 
생멸하는 흐름으로 있습니다. 윤회를 한 생이 끝나고 다음 생이 이어지는 것을 죽음과 생
이라고 한다면 더 짧은 윤회는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그래요. 우리는 태어난 순간순간 죽
는다는 이거예요. 찰나는 굉장히 짧은 시간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 현재에서 미래
로 흘러간다는 조건관계가 열려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새로운 조건을 끊임없이 만들고 
있고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반이나 해탈이나 이른바 완전한 세계
로 가는 것이 가능하고 이게 닫혀 있다면 그냥 이 모양, 이 꼴로 살다가 죽어야될텐데 그
렇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류상태: 확실히 불교는 상당히 과학적이고 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재성: 과학적이라기 보단 경험적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과학은 경험적인 것에 일부
만 밝혀냅니다. 과학으로 다 밝혀내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움직임을 과학이 다 발견해 
낼 수 없고 두뇌의 움직임도 과학은 아직 못 발견해냅니다. 있다는 것만 알지, 엄청난 일
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뭐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과학이 발견할 수 
있는 경험은 여전히 한계가 있는데 불교는 이 경험적인 얘기를 하면서도 마음으로 굉장
히 심도 있게 경험해 들어갑니다. 

조광호: 기독교는 과학 그 너머Beyond의 것을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자신의 논리를 합리
적으로 체계화해서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사상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상당히 있어요. 기독
교와 불교가 상당히 유사하지만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종교가 진리냐, 아
니냐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방식이나 비전이 다른 거죠. 
그런데 두 종교가 가장 다른 점은 창조에 관한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한 인간이 이 세상
에 태어났다는 것은 신의 창조로 말미암은 것이죠. 과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던 간에 분
명한 것은 신의 손길에서 고요하게 창조됐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누구도 손을 댈 수 없
는 절대절명의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굉장히 중요하죠, 곧 내 안의 우
주고 내가 곧 부처다라고 얘기할수 있겠죠. 

김재성: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이 다른 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유사하다는 것만 강조하
면 문제가 될 것 같아요. 기독교는 창조주인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
고 들어가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죠. 불교는 무신론적인 종교입니다, 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창조신이 없다는 겁니다. 창조
의 사건은 없었다는 거예요.

조광호: 내가 받았다는 것은 굉장한 거죠. 총리가 “내가 목숨을 걸고 하겠다.” 고 하지만 
사실은 숨을 쉬는 것이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죠. 기독교에서 보면 목숨도 내께 아
니거든요. 

김재성: 불교에서는 이 목숨, 이 생명이 있다가 끊어졌다 다른 생명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살도 살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은 고통 속에서 자기를 
죽이거든요, 생명은 생명의 원리대로 연기적으로 계속 반복되면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류상태: 요즘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해보는 그런 근사체험을 연구하는 분들은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이
며 서울대병원 의사인 정현채박사는 “우리가 죽어서 육신을 벗어나면 진동하는 에너지체
로 존재하는데 주파수에 따라 비슷한 에너지체끼리 모인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
들의 에너지체는 그것끼리, 증오와 질투로 살아온 에너지체는 또 그것끼리. 절대적 심판
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너지체에 스스로 천국과 지옥을 만드는 셈이다.”라고 이야기 합
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재성: 용어가 가져오는 엄밀성이나 혼돈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상당히 불교가 말하는 
생사관이나 견제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체가 죽고 에너지체가 
쑥 빠져나오는 것은 독특한 개념이고 불교에도 물론 그런 얘기들은 있습니다. 티벳 사자
의 서에도 그런 흐름들이 있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듯한 얘기도 있습니다. 우리
가 평소에도 유유상종으로 살거든요, 나하고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있지 않죠, 
같이 있으면 괴롭죠. 죽음에 임박해서,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퀴
블러 로스 박사의 저서나 다찌바나가 쓴 ??임사체험??이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에
서 최준식 교수님이 정리한 것이 근사체험기인데요. 근사체험 자체가 문화적인 색깔을 많
이 잊는다와 그 다음에 근사체험을 하고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삶이 비슷한 경험을 
했던 분들끼리 모인다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근사체험기를 
좀 자세하게 보아야겠습니다. 

조광호: 뇌 과학자인 이반 알렉산더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뇌사 판정을 받은 거예요. 그런
데 이반 알렉산더의 얘기가 "뇌에너지의 파동이 일어났다."는 거죠. 물리적인, 생물학적
인 죽음 너머에서 에너지가 움직였다는 거예요. 여기서 맹점은 과학자가 비과학적인 이야
기를 하는 거예요. “에너지끼리 모여서 어떻게 되었다.”는 식으로요. 그러면 그 에너지는 
전자파인지 중성자파, 또 다른 알파, 베타, 감마파인지 그런 연구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
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에너지끼리 모인다.”고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으로서 21
세기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시사 할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죽으면 베드로한
테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얘기가 있잖습니까? 그런 것은 사실 그 시대 사람들 얘기고 그
런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천당, 미국의 어떤 목사님은 
“천당에 갔더니 구름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고 얘기하던데 그런 얘기를 하면 요즈음 
사람들은 웃습니다. 
하느님이 심판대에 앉아서 심판을 한다는 것은 소설을 쓰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서 하는 것이죠. 중세 기독교도 신학자들은 지옥의 층수까
지 다 정해놨습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보듯이 신학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또 그 시대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니 오죽했겠습니까! 그
러나 오늘날에는 과학자들의 비과학적인 얘기이지만 굉장히 우리한테 호소력이 있는 얘
기 중에 하나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성: 그런데 그런 에너지체가 있어서 “맑은 에너지체가 있다, 어두운 에너지체가 있
다.” 불교에서는 붓다가 직접 경험했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다 봤다. 이 세계를 다 보고 
나니까 지옥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고 천상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는 죽어서 어디
를 갔다.” 이 분이 단지 비유로써 얘기하는 것보다는 당신은 “보고 직접 경험한 것만 얘기
한다. 내가 아는 것만 얘기를 하지, 내가 상상해서 얘기하는 것은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진
실이다.”라고 붓다가 직접 얘기를 합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경전 속에서 보면서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지만, 신부님이 말씀하셨듯이 지옥의 세계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런 어두운 에너지체가 모여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런 식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은 얼마든
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에 수행하는 분들 중에 명상 수행을 통해서 자기의 전생을 확인하는 분들이 실제
로 좀 있습니다. 그분들이 전생을 보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어둡고 힘든 경험
을 하는 세계가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된 것도 얘기하고 굉장히 밝고 행복했던 세계가 계
속 지속되었던 것도 얘기합니다. 어둡고 힘들었던 곳은 적어도 인간보다 아래의 세계, 밝
고 높은 것은 인간들보다 더 위의 세계의 삶을 여러 번 반복했던 것 그것도 사실은 무수
히 반복했다 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시작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분
의 경험으로는 안 가본 곳이 없답니다. 

류상태: 자기 전생을 보는 능력을 가진 분을 숙명통宿命通을 가졌다고 합니까?

김재성: 숙명통도 있고 요즈음에는 숙명통과 달리 연기법緣起法의 흐름에 따라서 전생을 
보는 경험들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묵 스님이 쓴 『윤회와 행복한 죽음』에 그런 사
례들이 있는데 이것은 한두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미얀마 <파욱 센터>라는 곳을 
저도 올해 2월에 다녀 왔는데 거기서 수행하는 많은 분들이 직접 경험한다고 합니다. 불교
는 경험적으로 죽음의 순간의 마음과 태어나는 순간의 마음은 동질적인 것이라고 합니
다. 아까 에너지체 얘기한 것과 비슷하게 사람이 만약 죽을 때 괴로워하고 죽으면 다음 생
에 태어나는 순간의 마음도 그 괴로운 상태의 마음으로, 우리의 상태가 굉장히 행복하다
면 다음 생의 첫 마음이 굉장히 행복한 상태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가 인간
으로 태어나서 마음이 쭉 연결되어서 흘러왔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위해 내가 태어나는 
순간의 마음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답니다. 그게 이미 경험한 것들은 어떤 기억체로 남
아있나 봅니다. 그러면 그 순간의 마음과 그 직전의 순간은 전생의 죽음의 순간의 마음인
데 이렇게 연결을 시킨답니다. 그러면 그 전생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숙명통이 아니라 마
음의 흐름을 따라서 넘어가서 마음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보기 시작하니까 경험하기 시작
하니까 그렇게 넘어가서 쭉 과거 생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고 전생이 누구였고 하는 것
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류상태: 현각 스님이라고 숭산 스님의 제자로 미국사람인데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다 우
리나라에 와 스님이 되신 분인데 그 분의 책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보니까 
“나는 전생이 한국의 독립군이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 
그 정론이 윤회론까지 오는 것 다 그대로 수용이 되는데 이런 식의 환생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재성: 현각스님이 애국가를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을 마구 흘렸답니다. 그 경험을 숭산스
님한테 말하니까 숭산스님이 “너는 전생에 독립군이었어.”라고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숭
산스님이 전생을 보고 얘기를 했는지 애국가를 듣고서 눈물을 흘릴 정도의 정서를 연결시
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김재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정된 자아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 김재성이 다음 생에 환생을 해서 또 다른 김재성이 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정신물질의 경험이 조건이 되어서 다음 생에 다른 존재 그것은 인간
이 될 수도 있고 천신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그런 존재로 바뀐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양식을 갖고 있기 때
문에 환생으로 볼 수 있겠지만 고정된 영혼이 있는 환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류상태: 우리가 생각하는 환생하고는 상당히 다릅니다. 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
는 하나의 현상의 연결이지, 그게 내 자신이 전에는 이런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이런 사람
이라는 것은, 글쎄요.

김재성: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도 될 수 있고 천신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고정
되어 있다면 쭉 인간이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인간으로 되는 식의 
구조인데『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본래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던 것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렇게 이해를 해도 되나요? 예컨대 “창조할 때 다 있었어, 지금 있었던 것
은 그때도 있었어.” 이렇게 봐도 되는 것인지요? 

류상태 : 그런 게 있긴 있지요. 

조광호: 제가 보기에는 올바른 성경의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세의 신비주의 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 제자들이 “하늘이 뭐라셨느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분은 동
아시아에서 대해 특별히 연구를 많이 했고 실제로 보면 불교적인 색채가 많은데 제자들에
게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출산出産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출산하신다는 얘기는 우리 삶이 프로그램처럼 하나 되가지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에서는 오늘 이 조광호가 있습니다. 그것이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지만 현재의 역사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기독교처럼 현
재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김재성: 불교도 중요시하지요. 현재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조광호: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이니 내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
죠. 내가 어떻게 하느냐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자가 “내가 전생의 무엇이냐는 호기심
과 미래의 나,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가기 위해서 그것이 교언巧言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
지언정 그것에 사로잡힌다면 모순에 빠질 수도 있고 인간의 삶을 말하자면 끼워 맞추기 
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합니다. 현재는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창조되는 
것, 미래의 충당도 다른 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어떤 공간에 나를 가져다 놓
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하느님께 구원 받았다는 것은 자기가 가면 구원받
는 거고 자기가 거부하면 안 갈 수도 있는 거예요. 이런 면에서는 아주 열린 역사관인 거
죠.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것이 죽음 아닙니까? 말하자면 억울한 죽음인데 예수의 십자가
의 죽음은 하늘나라와 부활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예수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밝혀준 거
죠.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굉장한 비전을 주는 말이예요. 죽음이 얼마나 두렵습니
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달라지고 없어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남이 죽이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하시는 말씀이 “평화가 너
희와 함께Peace be with you."입니다. 천국은 평화예요.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딱 그 두 
가지라고 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와 ”평화가 너희와 함께.“ 

김재성: “두려워하지 말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 이런 말은 불교에서는 아라한
Arhan, 阿羅漢이 되면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아라한은 두려움이 없습니
다. 누가 죽여도 두려움이 없고 죽음이 와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가 
이 분들한테는 의미가 없어요. 육체적인 죽음, 정신적인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
는다는 거죠. 열반을 완전히 성취한 성자죠. 완전히 평화를 이룬 분이고 그렇게 보면 기독
교에서 말하는 두려움이 없이 평화를 이루는 분들이 불교에서는 아라한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이생에서 할 수 있다, 물론 이생에서 못하면 다음 생으로 연결되면서 언젠가는 할 
수 있다는 게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언젠가 울릉도에 가서 목사님과 4시간 동안 
이야기하는데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그때 승복을 입고 있었거든요. 
1988년도인데 대학원 졸업하고 그리고 울릉도를 갔다가 목사님하고 얘기를 한참하다 보
니까 거의 같은 얘기를 하고 있더라구요. 길과 진리니 똑같은 얘기를 하다가요.

류상태: 그 분도 그렇게 느끼시고요?

김재성: 네. 그 분도 불교 얘기도 들으면서 자기 얘기도 하면서 상당히 유사한데 물론 저
는 기본적인 신앙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상당히 언어적 접근이 유사하다 그런 것들을 많
이 느껴서 예수님의 “두려워하지 말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은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죽음이 그렇게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적인 신앙
을 가지고서 잘 산 사람들한테는 문제가 안 되는 것이지, 신앙이 있어도 못산 사람들은 두
렵겠지요. 종교가 없어도 잘 산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도 있다고 얘기할수도 있
지 않을까요?

조광호: 신앙으로 연결해주는데 한 가지 건강한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논지는 묘사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게 어떻다 얘기 해봤자 안통하고 해봤자 못 알아듣는 세계에 대해
서 하느님이 마침표를 찍었는데 물음표를 자꾸 달지 마라 하는 얘기와 같은 거지요. 그것
을 자꾸 신학자들이 물음표를 달고 지옥의 평수를 재는 것은 되지도 않는 얘기지요.

류상태: 공자님도 제자들이 “하늘 얘기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내가 땅의 얘기도 다 
모르는데 하늘의 얘기를 어떻게 알겠냐고 그러셨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재성: 공자님은 현실주의자니까요.

류상태: 신부님도 말씀을 들어보면 상당히 독실하면서도 교리적으로 닫혀 있지 않고 열
려 있으시네요. 

조광호: 교회 자체가 닫혀 있지 않고 사실은 열려 있어요. 그런데 그게 왜 폐쇄적으로 되
냐 하면 진리를 자기가 독점했다고 생각하니까요. 오만이죠. 진리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니
까요.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줄라고 생각하니까 커다란 진리에 우리가 겸손
하게 생각해야죠. 

류상태: 어딘가에서 보니 환생할 때까지 이생에서 다음 생까지 굉장히 오랜 기다림이 있
어야 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환생이라고 하는 것이 즉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
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재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정통 테라바다therav?da, 남방불교에서는 죽음과 태
어남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듯이 연결되어 있
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 태어난 삶이 우리가 확인은 안 되지만 어떤 아귀세계의 
영역이다. 그리고 거기서 일정기간 살다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할 수도 있을 때에 이것을 
중간계라 할 수도 있습니다. 중간 단계, 중음中陰, 중유中有라고 합니다. 사유死有, 죽음
의 순간의 존재에서 생유生有, 다시 태어나는 존재가 있는데 이 중간에 중유가 있다고 주
장하는 학파가 있습니다. 이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많은 얘기를 했고 지금 티벳불
교는 그 연통의 교리를 받아서 49일을 얘기하지요. 

류상태 : 중음신이라는 것인가요?

김재성 : 중음신中陰神이고 중유中有라고 합니다. 중음이라고 하는 것은 중간의 오음五陰
이라는 것이에요. 

류상태 :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귀신과 같은 개념인가요? 

김재성 :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귀신은 사실 아귀에 가깝습니다. 아귀라고 하는 존재, 
사실은 Hungry ghost라고 영어로 번역하는데 죽어가지고 좀 비참한 어떤 존재이지만 인
간들 근처에 산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입니다. 붓다의 눈에는 보였다고 합니다. 
아주 이상한 몸짓을 하고 있고요. 아귀적인 측면이 우리한테도 있을 수 있지요. 돈을 수천
억 원 가지고 있어도 쓰지 않고 모아놓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아귀의 마음이라
고 하거든요. 인간은 아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귀로 사는 인간들이 많다는 얘기에
요.

조광호: 제가 보기에는 많은 게 아니라 대부분 아귀입니다. 

류상태: 지금 말씀하시는 아귀, 중음신, 귀신 이런 개념이 우리한테 어떤 다른 삶을 알려
주기 위해서 도입한 방편方便인가요? 

김재성: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붓다가 보았고 보고 나서 설명해준 것입니다. 

류상태: 그러면 귀신도 있는 것입니까?

김재성: 귀신이라는 말은 한국의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나 또는 기독교 문화 속에 있
을 수 있지요. 그런 존재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지요. 그리고 그 아귀 중에 어떤 아귀들
은 인간 몸속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예컨대 신통제일인 목갈라나Moggallana 존자로 아라
한이 된 분으로 아귀가 몸속에 들어와 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배가 아파서 이게 왜 아픈
가 봤더니 아귀가 들어와 있는 거예요. 일종의 빙의가 된 거예요. 그래서 타일러서 보냈다
고 합니다. 그게 불교에서는 한 존재의 영역 속에 다른 존재가 들어올 수 있다고 보는 거
예요. 그것을 경전 속에서 이야기 하니까 저희는 그것을 비유로 무슨 살라고 얘기한 게 아
니라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최근에 나온 <포제션>이라는 영화에서 유대교
의 상자 안에 가두어 두었던 악령이 사람 몸에 들어와 가지고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그런 
영화가 있더라구요. 그런 전제들이 윤회 속에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중음신 얘기하다가 아귀 얘기를 했는데 아귀적인 상태를 중음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고
요. 죽음과 태어남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게 기본적인 것인데 중음신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존재 영역입니다. <중천>이라는 영화가 있어서 우리의 개념과 중간에 가서 머물
렀다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연옥과 같은 비슷한 영역을 만들어 놓은 개념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을 합니
다. 그렇지만 그것도 하나의 존재영역이다. 그것이 좀 비참할 수도 있고 아직 결정이 안 
되가지고 머뭇머뭇 하다가 다른 존재로 갈 수 있으니까 최대한의 49일을 잡고서 그 안에 
계속 좋은 곳으로 가라고 법을 들려주는 것이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입니다.

류상태: 49제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네요.

김재성: 있지요. 의미가 있을뿐더러 기제나 중간 중간에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서 선행을 
베푸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람이 제사
를 지내는데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려고 막 생명들을 잡아서 지내려고 하니
까 “그렇게 하지 말고 당신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서 선행을 하라. 선행의 공덕이 좋은 
복덕이 조상에게 돌아가도록 마음을 먹어라 그러면 그것이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셨지
요. 

류상태: 부처님 오신 날 연등으로 봉헌을 하고 부모님이 더 좋은 세상을 가기 위해서 정성
껏 봉헌도, 보시도 합니다. 이것 자체가 미신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김재성: 그것은 미신적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친족 간에는 내가 한 선행의 좋은 결과를 계
좌이체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계좌이체가 되는 존재가 딱 하나 있어요. 아귀에요. 조상
이 아귀로 태어났을 때만 계좌이체가 되구요,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지옥에 갔거나 천상으
로 갔으면 안 간답니다. 왜냐하면 통로가 없어서 받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
게 되느냐, 그럼 이게 내 계좌로 다시 돌아온답니다. 선행이 없어지지 않고. 어쨌든 부모
에게 가든 나에게 오든 공덕은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류상태: 그러면 우리 무속에서 무당들이 교류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장군님
이라고도 하고 그 존재들이 아귀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까? 

김재성: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꼭 아귀라고 할 수 없어요. 신들은 아귀도 있지만 지상에 
사는 신들도 있어요. 목신도 있고요. 최근에 수행하는 어떤 의사 선생님이 저희가 수행하
면서 자애의 마음을 일으켰더니 이 근처의 있는 신들이 모두 행복하길 비니 목신이 보이
더랍니다. 나무에만 앉아 있더래요. 나무가 아니라 목신이예요. 그런 목신들은 지상에 사
는 신들이지요. 아귀는 아닙니다. 괴로운 존재는 아니고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얘기입니
다. 그런 존재 중에 어떤 산신山神의 개념도 있을 수 있죠. 그러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면 
사실은 무당들이 섬기는 신들은 아귀의 신이 아니라 조금은 영적으로 좀 맑은 신일수 있
고 그중에서도 욕심이 많은 신일수도 있습니다. 아직 번뇌에서 못 벗어난 존재들이니까 
얼마든지 잘못하면 해코지도 할 수 있고 좀 도와줄 수도 있고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
다. 

류상태: 그러나 어쨌든 그게 방편이 아니라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얘기지요. 신부님 어떻
습니까? 우리 그리스도교에 세계관에서 지금 김 교수님은 그런 모든 것들이 올바로 살라
라고 하는 방편의 가르침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는 것이거든요. 우리 그리스도교 연통에
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조광호: 말하자면 아귀의 존재를 따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이원론적 우리 기독교에
서는 부정하는 것이죠. 악의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이 부족한 것을 악으로 보
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줘서, 제대로 감당도 
안 되는 자유를 줘서 저렇게 허우적거리게, 죄를 짓게 하느냐 뭐 이런 얘기들이 나오잖아
요. 그런데 제 개인적인 얘기지만 제가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악의 신비가 있어
요. 악의 신비, 인간의 말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만난다
든지 다 설명을 못해요. 입을 닫아야지, 그러다가 자꾸 설명하면 사실 그것은 가짜거든
요. 말을 상당히 아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제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귀신이 있
느냐! 그런데 하나 확실한 것은 뿔 달린 귀신 그런 것은 없고 우린 믿지를 않아요. 우리 그
리스도교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믿으며 아니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신경에 요약이 
잘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귀신의 존재를 믿으며 이렇게 하는 얘기가 없어요. 그러나 유
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해요. 악의 존재가 있어 가지고 악에서 구
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선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악에서 구해 달라 
더 강조해서 얘기합니까? 그렇게 안하면 인간이 교만해서 더 하니까 악에서 구해 달라, 진
리에 대한 경외심을 주는 거죠. 지혜를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출발
을 어디서 보냐면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간 것을 출발로 봐요. 지혜서 2장에 나옵니
다. 그 지혜를 깨달아서 아는 논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라, 그것은 굉장
히 인간적인 가르침이죠. 전통에 의해서 말하자면 마귀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유
혹에 빠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유혹은 뭐냐! 존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그
런 악의 경향성이 있다, 약함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뼈저리게 느낄 때 하느님의 도움을 
얻고 또 겸손으로 더불어 나가는 것이지, 악이 있어서 이렇게 한다거나 악을 달래기 위해
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 내 의지의 희생을 통해서 적극적
인 선의 지향으로 가야지요. 

김재성: 아귀라는 것은 배고픈 귀신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악의 덩어리가 아니고 욕망의 
덩어리예요. 

조광호: 그러면 그것은 똑같은 얘기네요.

김재성: 욕망은 근데 치유가 될 수 있는 욕망이지, 욕망으로만 뭉쳐서 계속 아귀가 된 것
은 아녜요.

조광호: 그것은 시청각교재로 만든 것 아닌가요? 말하자면 메타포metaphor 시켜가지고
요?

김재성: 그것을 메타포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붓다는 직접 봤다고 얘기합니다. 메타포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본 존재를 묘사해놓은 것이 있어요. 다른 사람도 보니까, 제자가 봤
을 때 비로소 얘기를 합니다. 혼자 봤으면 신부님 말씀처럼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데 다
른 제자가 예컨대 신통력 있는 목갈라나가 “부처님, 제가 오늘 이런 존재를 봤는데 하고 
얘기를 하니까, 이제 네가 봤느냐?”고 합니다.

조광호: 그것은 부처님만 보는 게 아니라 나도 매일 봅니다. 내 안에 아귀가 많더라고요. 

김재성 : 사실적인 존재이지만 이게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 존재들도 윤회하는 속에서 
욕망과 무지가 많아서 일정한 시간동안에 과보를 봤다가 그 과보가 없어지면 다시 나옵니
다. 이것은 종신이 아닙니다. 불교는 종신제가 없습니다. 지옥도 종신이 아니고 천국도 종
신이 아닙니다. 이 삼계, 윤회세계는 항상 오고가는 세계입니다. 

류상태: 아귀도 천인이 될 수 있고 나중에 거기서 또 해탈해서 부처도 될 수 있다는 말인
가요?

김재성: 물론입니다. 절대 악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이제 인간이 탐욕과 분노와 무지貪
瞋癡에서 오는 번뇌 때문에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그러다가 죽으면 어두운 에너지체가 있
는 곳에서 잘못을 한만큼만 벌을 받으면 끝나버려요. 다행스러운 것이지요. 고통도 한계
가 있고 행복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늘 잘 살아라,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또는 어디서든
지 순간순간 새로운 것을 좋은 것을 창조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은 거의 같습니다. 

류상태: 기독교에서는 지옥은 영원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한번 거기 가면 거기서 영
생인데 그거야 말로 메타포로 이해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잔인할 것 
같은데요. 

조광호: 천국과 지옥이 영원하냐! 그런데 사실 우리가 영원에 대한 개념을 갖는다는 것은 
인식일 뿐이지, 가능할 수 없거든요. 유한을 벗어나서 무한의 세계로 차원을 달리 했을 
때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의 개념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봐요. 뭔가 은표해야 돼요. 
저는 신부이자 화가이지만 종교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득이 안 돼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면 이교도의 고깃덩어리지, 하느님이 무슨 그렇게 생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지만 그런데 안 그릴 수도 없어요. 뭔가 보여 주어야 하니까요. 제가 신부지만 어떤 때는 
미사를 안 드리고 싶어요. 둘이 막 싸우고 있는데 그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뭔 화해의 미
사를 드려요. 안 드리고 싶지만 신부니까 시간이 되면 가서 할 수 없이 한다는 말이에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은 정말 눈물겨운 거죠. 엄밀한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 되
는 것, 그 상황이 있다는 것 을 인정하면요, 영원히 지옥 간다 그거는 내가 보기에는 교리
의 도그마dogma에서 이야기를 한 것뿐이지, 그것이 그러면 존재의 실상이냐, 난 개인적
으로 그렇지 않다고 봐요. 예전의 독일신학교의 교수가 “영원한 지옥은 없다.”라고 말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도그마를 가벼이 치면 신부 옷 벗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쫓겨났습니
다. 쫓겨나면서도 “나를 쫓아내지만 지옥은 없다.”라며 자기의 확신을 믿은 거지요.

김재성: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그렇게 이단시 되었지요. 

조광호: 나를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쫓아내봤자 효과가 없으니까요. 

류상태: 참 부럽습니다, 저는 목사였는데 개신교에서 쫓겨났거든요. 여기까지 오니까 막
힐 것이 없네요. 그대로 통하겠네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으로 딱 닫아버리면 소통이 어
려운데 신부님처럼 그렇게 그것마저도 메타포로 이해를 하고 그 영원이라고 하는 것도 메
타포로 이해한다면 말이죠.

조광호: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에 대한 작업으로 은하수 작업을 해요. 요새 제가 은하수를 
크게 자꾸 만들어요. 그것을 보면서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이 가장 두드러지는 게 어떤 
특징이 있어요. 사람들의 신음소리, 불, 이런 것이 아니라 가장 처음에 드러나는 게 거기
에는 별이 없어요. 빛이 없는 세계예요. 빛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영원히 하느님, 부처님, 
극락 거기에는 여명의 빛이 우리와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시간, 공간이 없어요. 저 
너머에 빛과 빛이 아이콘텍이 되는 거예요. 관상이 가장 기도에 정점에 있듯이 불교에서 
어떤 니르바나 세계에서 관하듯이 보는 거죠. 관세음보살 하듯이 보는 거죠. 우리는 하느
님과 막 바로 지복직관Visio beatifica 이렇게 얘기를 하고 천당을 가라 그러죠. 빛을 받
은 거죠. 그런 단계이니까 공간, 시간을 자꾸 갔다가 마침표를 찍어놨는데 물음표를 달 필
요가 없다고 봅니다. 

류상태: 죽음이라는 것이 적어도 종말은 아니다, 다음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인데 그 다음 
세계가 어떤 거냐, 기독교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예비해두신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불교적
으로는 또 어떤 윤회를 거치는데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세계라고 한다면 이 현
세에 그냥 아등바등 이게 전부인 것처럼 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세인들이 이런 
지식과 정보를 얻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떻게 살면 좋겠는가라고 하
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재성: 잘 살아야지요.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자기 주변의 가족들, 
사회구성원들 또는 존재 세계 전체에게 유익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충
분히 살은 사람들이 그 다음으로 자기 해탈을 위해서 가는 길이 놓여지는 거지, 자기만 혼
자서 막 살고서 마지막 혼자서 잘살겠다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경을 팔정도八正
道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기도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 체계로 만들어 놓았는데 
윤리적으로 건전하고, 계를 지키고 정신적으로 명료하고 평화롭고 그 다음에 깨어있고 
그 다음에 지혜롭고 이것이 갖추어져야만 가능한 삶이기 때문에 토대부터 함께 잘 살고 
대인적인 마음이 명료하고 맑고 그 다음에 고요하고 그 다음에 명철하게 깨어있는 지혜
가 있고, 지혜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어떤 그런 앎인데,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좀 어렵지
만 그게 연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건관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 이렇게 볼 수 있겠지요. 그
것을 갖추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에서도 할 일이고 다음 생에 가서도 할 일이고 내내 그것
을 하다가 깨달으면 또 그것을 나누면서 살아요. 그래서 벗어나는 삶은 없다는 것이죠. 
그 틀 안에서 성장하고 완성되고 또 사람들의 성장을 돕고 하는 이게 팔정도 육바라밀의 
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조광호: 지금 우리는 삶만 봐서는 안 되고 삶 속의 죽음을 봐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
리 인간의 구조가 좌뇌 우뇌, 오른쪽 눈 왼쪽 눈, 콧구멍 2개, 귓구멍 2개로 모든 커뮤니케
이션 할 수 있는 것은 양쪽의 밸런스가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래서 자기가 정말 
잘 나갈 때도 제어해야 되듯이 생명이 있는 순간 인간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죽음을 
눈으로 봐야 된다고 봅니다. 생사生死가 같이 붙어있는 것이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입은 하나 밖에 없잖아요. 입이 하나 밖에 없다는 이유는 이것을 통합해서 내 얘기
를 세상에서 하고 커뮤니케이션을 내가 하는 것이지 그냥 한 가지 쪽으로 가면 인간은 영
생이 없다고 봐요. 죽음 부활이 같이 있는 것이고 천당이 나중에 죽어서 어떤 공간을 만드
는 것이 아닙니다. 한 쪽 눈으로 보면 거리감이 없습니다. 두 눈으로 봐야 거리감이 있고 
음악도 양쪽 스트레오로 들어야지 음악의 색깔과 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듯이 그런 밸런
스, 그러니까 매일 죽음을 생각해라, 매일 삶을 생각하듯이 매일 죽음을 생각하라, 염세
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지혜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을 못하지만 나
이도 먹고 늙으니까 매일 죽음을 생각해요. 조심도 하고 요즈음 그렇게 삽니다.

류상태 : 결론은 잘 살아야 된다고 통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산다는 개념
을 너무 잘못 써서 돈 많이 벌고 사는 것을 잘 산다고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윤동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정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사는 그런 잘 사는 삶을 사는 것
이 결국은 삶과 죽음을 통합하는 바른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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