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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147호【성찰하는 삶】『 잘 살아야만 잘 죽는다? 』 - 송기득 -
<<삶을 걷다 _ 죽음 맞이>>

잘 살아야만 잘  죽는다?

송기득 / 토착신학의 길을 걷고 있는 원로신학자로 계간지 <신학비평>, <신학비평너머>
를 창간하여 오랜 기간 주간으로 일했다. 『사람 아직 멀었다』, 『사람살이가 구도의 방
랑길입니다』, 『탈신학 에세이』 등 다수의 책을 썼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마련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는 모른다. 이것은 사람에게 필연의 운
명이다. 어떤 이는 이 사실을 ‘죽음의 진리’라고까지 말한다. 죽음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진리’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은 맞지 않는 듯하다. 죽음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대
로 타당성이 있지만, 그는 그만큼 죽음이 사람에게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뜻
이라면 아주 어긋나는 말은 아니다. 
죽음의 필연성과 가능성은 굳이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언젠가
는 닥칠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리가 갖춰야 마음가짐이나 자세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런대로 무의미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미리 해 둔
다면, 죽음을 ‘차분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차분하게 맞이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삶을 잘 마무리하자는 것이
다. 이른바 삶을 ‘웰엔딩Well-Ending’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잘 죽자’는 것이다. 우리
의 최후를 깨끗하게 맞이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웰 다잉Well-Dyding’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 것인가. 우
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난관과 위험에 처하더라도, 아무리 허탈과 절망
의 위협에 몰리더라도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까. 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는 사람의 삶은 본디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마
지막에 ‘원자의 해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원자의 결합은 원자 자체의 운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원자의 해체 운동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게 하는 최초의 철학이다. 그는 원자론을 내세워서 사람의 죽음은 사람이 의례히 겪는 자
연의 현상임으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 방안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지 모른다. 다만 그는 죽는다는 것은 자연의 현상임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스토아Stoa철학에서는 ‘마음의 평정Ataraxia’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사람
을 자유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교의 교리창시자 바울로는 죽음이란 ‘그
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죽음에 대한 죽음의 선고死의 死亡宣
告’를 내렸다. 
“죽음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이나 그 무엇
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죽음에 대한 승리의 개가凱歌이다. 아
마 이 말은 죽음의 위협에도 신앙을 지키겠다는 결의일 것이다. 순교자란 바로 그런 사람
이다. 상대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목숨으로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
는지 모르지만, 그의 주체적인 결의는 한없이 존경스럽다. 정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살생성인殺生成仁이나 분신공양焚身供養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타력他力에 의해서 손쉬운 길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른바 
‘내세의 신앙’이 그것인데, 현세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죽어서 ‘천당이나 극락에 간
다.’는 믿음이다. 괴로운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사는 것 보다 죽으면 ‘좋은 세상’에 갈 터이
니 굳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이야기이다. 아이가 굶
어 죽은 것을 본 어머니가 아이를 붙들고, “배고프지 않는 하늘나라에 가서 잘 쉬 거라.”
고 통곡한다. 여기에는 ‘내세가 있다’는 신념이 뒤를 받쳐줘야 가능한데,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지옥이나 들먹거리면서 교인(신도)들을 협박하거나 공갈하는 목사나 스님들은 돈 
바치는 것을 신도들에게 헌금이나 불전佛錢을 내게 하는 방편으로 삼을지 모르지만, 무엇
을 ‘안다는’ 지식인들에게는 내세의 신앙 따위는 잘 통하지 않는다. 일단 사람의 목숨이 끊
어지면 그것으로 사람의 삶은 끝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들의 수련목표
가 삶과 죽음은 하나生死一如라는 깨침에 있다고 하여 삶과 죽음을 동시에 넘어서려는 스
님들은 극락왕생極樂往生을 팔아먹는 ‘땡땡이스님’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몸소 
그 길을 가는 성직자는 신도들을 천당지옥 따위로 협박하지 않는다. 하느님이전에, 그리
스도이전에 성령이전에 ‘사람’이 먼저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흔히 말한 죽음은 실제적이고 현실적
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준철학적準哲學的인 죽음은 실감하지 못한다. 본래 철학
은 인간의 불사성不死性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던가. 하기야 죽음은 죽어보아도 모
른다.

 어느 날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가 글방에 있는 나를 불렀다.
 “무엇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었어요?”
 “죽음에 관해서 쓰고 있었어요.”
 “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죽음에 관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오.” 
 “죽음은 죽어 봐도 모르니까, ‘죽음의 의미’에 관해서 쓰고 있었을 뿐이라오.” 
 “‘죽음이 의미’가 어떻게 ‘사실의 죽음’이 될 수 있나요.” 

아내가 앓고 누운 지 2-3년이 지났을까. 아내는 죽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보! 우리 그만 살까? 너무 고생이 많으니.” 
“왜 그처럼 약한 소리를 하세요. 부르면 언제나 가야죠.”

아내는 죽으면 하느님나라에 갈 것을 확신하고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아내는 이미 삶
이니 죽음이니 따위는 넘어서 있었다. 아내의 모습이나 말에서 나는 아내가 생사를 초월
해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아내는 죽음을 노닐었다. ‘생사일여’를 득도得道한 것인
가. 아내는 살아서도 나와 함께 살았고, 죽어서도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아내는 죽지 않았
다. 
죽음이 ‘의식意識의 정지’라면 정지된 의식으로는 죽음은커녕 그 무엇도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사실의 죽음’은 끝내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老子는 죽음을 삶 그 자체와 공존
하는 것으로서 죽음의 사실성을 인정했다. 그는 삶이란 삶과 죽음의 균형이라고 했다. ‘생
사 곧 균均’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학과 멀지 않다. 의사가 ‘정상’이라고 진단하
는 것은 삶의 요소와 죽음의 요소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
가 말하고 있는 죽음은 죽음 그 자체라기보다, ‘죽음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때 죽음을 느끼는 것인가. 그것은 의사가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은 낫
을 수가 없습니다. 불치不治의 선언은 이 병으로 하여 당신은 죽게 될 것이라는 소리이
다. 아마도 말기암환자는 죽음을 현실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0대 때 중증결핵
을 앓았는데, 어느 날 간호사들이 “이 환자 죽겠는데” 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
고 나는 고열(38?-40?)로 6개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니까, ‘아, 이러면 죽는 것이구
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괴로우니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죽음이 무엇
인지 모르지만, 죽으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극한상황에 이르렀으
면서도 죽음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숨을 쉴 수 없게 되겠구나 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는 “나를 살려주시오.”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20대의 나로서는 몹시 살고 싶었던 것
이다. 한발은 삶에 한발은 죽음에 담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죽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죽음은 살아서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는 앎의 건너편彼岸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인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이가 88이 된 나는 죽을 날
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철학적 의미를 
묻기 전에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싶다. 죽을 준비를 하자는 것
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죽을까. 어떻게 해야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나
의 생각을 통해서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한다.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그래서 나는 죽는다
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는다는 말이
다. 다만 건강을 돌보는 데는 신경을 쓴다. 몸에 좋다는 것은 그냥 먹어둔다. 극심한 치주
염 탓으로 주로 유동식만 먹지만, 오곡밥을 유유에 갈아 먹으면 그런 대로 지낼만하다. 종
합비타민이나 오메가3도 먹는다. 약을 먹기 위해서는 배를 비어둘 수가 없다. 약을 먹기 
위해서라도 끼니를 챙기는 것이다. 몸 대접을 이 만큼 해도 잘한 셈이다. 홀로살고 있는 
나로서는 최선을 다 한 셈이다.
그러나 만성두통과 치주염은 나를 몹시 괴롭힌다. 진통제를 먹어도 잘 안 듣는다. 만성이 
된 모양이다. 수면제를 먹어도 잘 못 잘 때가 있다. 그 땐 화가 난다. 그러면 두 세알을 더 
먹는다. 하나의 자학自虐이다. 날마다 머리가 패고 잇몸이 시큰거리니, 그만 살고 싶은 마
음이 들기도 한다. 죽으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련만. 해서 영면永眠의 유혹을 받
는다. 허나 나는 앞으로 2년을 더 살 필요가 있다. 나의 신학에 대한 책 2권이 2년이 지나
야 나온다. 나의 마지막 책이니 만져보고 가고 싶다. 그리고 아내의 ‘신묘살이’가 내년이 
지나야 끝난다. 그런데 대모신단大母神壇에 모신 아내는 웃음 지으면서 참배할 때마다 
“씩씩하게 살아라.”라고 타 이른다. 요즈음에 시골 초로初老들이 하는 말이란다. “살 때
는 힘차게. 죽을 때는 꼴깍!” 나도 그래볼까. ‘8899123-팔팔하게 99살까지 살다가 하루 이
틀 앓다가 죽고 싶다.’의 바람은 하늘의 별을 따려는 사치스러운 애교愛嬌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바람은 죽음을 친숙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삶이고 죽음이고 
모두 넘어서고 싶다. 아예 생사를 의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지금 시도
하고 있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텅 비우며 살고 싶은 것이다. “빈탕한 데 
맞춰 놀이”(유영모) 하고 싶다. 무아無我의 자리에 이르는 ‘지인至人’이나 ‘달인達人’이 되
고 싶다. 이 자리에 쉽게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날마다 명상이나 참선을 통
해서 ‘비움의 자리’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아내를 마음에 가득 품으면 잡념에서 벗어나 자
유로워지기도 한다. 밤에는 아내를 부른다. 초혼招魂이다. 그러면 잠이 잘 온다. 어쩌면 
그것은 내게 거는 최면催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를 온통 잊고 살았으면 한다. 자기망각
自己妄覺이며 자기초탈自己超脫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기도해봤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5년 동안이나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기도했다. “하느님, 편안히 숨을 
거두게 해주십시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내는 의식을 잃고 죽어 살았다. 거의 반시간
도 못가서 뚫린 목구멍에서 호스로 가래를 뽑아내는데, 아내는 얼마나 괴로운지, 오만상
을 찌프리면서 온 몸을 비비꼬았다. 그 고통이 한 시간에 여러 차례 왔다. 고통의 절정을 
겪는 것이다. 나는 기도 했다. “하느님, 빨리 데려가십시오.” 그런데 아내는 1년 3개월이
나 그 고통을 연속으로 겪다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 그때 아내가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지
금도 온몸이 떨린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데 인간의 처참한 고통과는 무관한 
존재인가. 우리는 그 하느님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니 은총이니 
말하는 사람은 도리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니, 그에게 미혹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는 철저한 주체의식主體意識을 가져야 한
다. 따라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에게 대들거나 욕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사生死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나는 ‘하느님’ 개념의 
종교적 신학적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신성(神性, Gottheit)과 신(神, Gott)을 구별할 
줄도 안다. 그리고 기도의 심리학적, 신학적 의미도 알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다
급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 어느 초월적인 능력자에게, 전지전능한 하느님에게 기도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살려달라고 하느님에게 절규하는 것은 남편으로서는 당연하
지 않는가. 나는 신학자 이전에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족의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큰 바위무더기 아래에서나 당산의 신목神木아래서
나 그밖에 그 무엇에든 촛불을 켜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
다. 그 기도는 환자의 생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이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사람다움의 
고귀한 향기香氣이다. 

나는 최근에 나를 잊고 사는데 익숙해졌다.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것이다. ‘자연의 미학’으
로 돌아간 듯하다. 파란 하늘, 흰 뭉게구름, 푸른 산야, 노랗게 물든 들녘, 이 모든 것은 나
의 ‘삶의 자리’이다.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이것이 나의 삶인 냥 
산다. 그러다가 “가면 가는 것이지 뭐.”이다. 다만 남에게 부담은 끼치지 않고 떠나고 싶
다. 그래서 선산先山 가까운 고향마을에 ‘죽으러가는 집’을 마련하고 있다. 나의 주검을 치
운다는 게 얼마나 부담이겠는가. 다만 지금 나는 내가 살아온 대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마지막 죽음을 내가 죽기 전에 친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영력靈力
을 기르고 있다. 나를 넘어 수도와 수련으로 보내고 있다. 이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의
미와 이유이다. 나는 깨끗하게 죽고 싶다. 내가 거동을 못하고 병석에 누어서 지내야 할 
경우, 말기 암과 같은 불치의 진단을 받을 경우, 또는 치매가 시작됐다는 통고를 받을 경
우, 나는 내 삶을 바로 마감하고 싶다. 사람은 날 때는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태어났지
만, 죽을 때는 얼마든지 자사自死나 자결自決을 결행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타고 났
다. 나는 나의 삶이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이미 길벗들과 함께 나의 ‘인생송별모임’을 가졌다. 죽어서 보는 것은 ‘주검屍身’에게 곡哭
하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살았을 때 손 한 번이라도 잡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
서 나는 사람들이 죽기 전 의식意識이 있을 때 가까운 길벗들을 초대해서 ‘인생송별모임’
을 가지기를 간곡히 권하고 있다. 길벗들이여! 이 인생송별잔치의 캠페인에 동참하기 바
란다.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장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어쩌면 새로운 
삶의 시작인 줄 모른다. 나의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환생還生이고 부활이다. 영
생永生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구약성서가 ‘의인’의 부활만을 인정하고 ‘악인’의 부활
을 인정하는 데는 깊은 뜻이 있다. ‘나’의 죽음은 사실 나에게는 이미 사라졌고, ‘남’에게
만 남아있는 것이다. “아까운 그 사람, 잘 살다 갔다(죽었다).”고 다른 사람이 애도하고 칭
송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잘 죽는 것인가. 그래서 추하게 죽지 말고 거인답게 죽었으면 
한다. 하지만 몸부림치고 죽는 것도 죽음의 정상이다. 그것도 사람답다. 꼭 천사처럼 가
야 거룩한 죽음이 아니다. 

어느 프랑스 고고학자가 제자를 데리고 동남아 어느 밀림을 답사하다가 독침에 찔렸다. 
죽어가는 스승을 본 제자는 너무 다급해서 기도를 드리려는데, 어떻게 기도할 줄 몰라, 어
릴 적 교회에서 들은 “주의 기도”가 생각나서 멋모르고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다.
“죽음이란 없다네. 지금 내가 죽어갈 뿐이라네.”
앙드레 말로는 이 말로서『왕도로 가는 길』을 끝맺는다. 그렇다. 죽음으로 가는 왕도王
道는 없다. 죽음 그 자체가 왕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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