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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144호【문화】『 그리스도를 향한 광적인 사랑과 미술 _폴리뇨의 안젤라 』 - 이은기 -
<<중세 신비주의 미술 이야기>>

그리스도를 향한 광적인 사랑과 미술 _폴리뇨의 안젤라 

이은기 /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명예교수, 지은 책으로 『욕망하는 중세』, 『권력이 묻
고 이미지가 답하다』 등 다수가 있다.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는 지금 여성이 총리도 하고, 대통령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이 노벨문학상도 
타고 평화상도 받는다. 여성화가의 작품을 보러 해외여행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아슬
아슬한 비키니를 입고 몸매를 과시하며, 프렌치 키스를 꿈꾼다. 여성에게도 정치, 권력, 
지성, 예술, 성적과시의 욕구가 충만하다는 증거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류역사에서 
여성의 평등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동서양 3000년의 역
사 동안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은 문맹이어야 했고, 순결, 순종이 가장 큰 미덕이었다. 
아니 강요된 덕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양의 중세가 가장 억압적이었다. 여자는 글을 배
워서는 안 되고, 바깥출입을 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 남편이 집을 떠나며 부인에겐 쇠로 
만든 정조대를 채웠다. 
그럼 중세나 현대나 이 지구위에 살던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고, 여성도 같은 여성인데, 수
많은 제약 속에 있었던 중세 시대에 여성의 권력욕, 지성, 예술성, 성적욕구들은 어떻게 
처리(?), 표출(?), 아니 발현되었을까? 이를 발현시킨 이들이 바로 중세 성녀들이다. 중
세 여성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야 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수녀가 되는 길
이었다. 수녀는 물론 더 큰 제약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곳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수녀 공동체를 이끄는 수녀원장도 될 수 있었고,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를 수도, 필사본의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권력, 지성, 예술, 심지어 사랑의 욕구까지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욕구들은 금지의 단단한 성곽 안에서 발현되었다. 욕
구가 아닌 영적인, 신비한 종교체험의 이름으로. 신비주의 성녀들의 수많은 참회, 비전(환
시), 기적들이 이를 증거한다. 
시에나의 카테리나(Caterina da Siena: 1347 – 1380)는 교황을 설득할 정도로 지적인 웅
변을 잘 하였다. 라인 강 유역 빙엔의 힐데가르드(Hildegard von Bingen: 1098 – 1179)는 
오페레타를 작곡하고 자신의 신비한 비전을 필사본에 그려서, 여성의 감수성으로 경험한 
성경해석을 보여준다. 그리고 폴리뇨의 안젤라(Angela da Foligno: 1248 경 - 1309)는 예
수와 하나가 되는 비전(환시)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 모든 비전과 활동들은 참회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주제로 전해진다. 그것만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서양 중세 시대, 신비주의에 속한 성녀들이 많이 있지만 나는 앞으로의 글들에서 성녀들
의 비전과 미술을 연관 지을 수 있는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신비한 비전을 그림으로 옮
긴 비전 회화, 그림 또는 조각 등의 종교미술이 영성 체험에 매개역할을 한 일화, 신비주
의 성녀를 그림으로 나타낸 제단화 등 다양한 형태의 미술품들을 다룰 예정이다. 그러나 
종교미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또는 종교일화의 설명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들 성녀들의 신앙체험과 미술, 성녀그림에 투영된 여성상등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이면
서 또한 통합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번 글은 폴리뇨의 안젤라와 그녀가 그 앞에서 기
도하거나 비전을 경험한 종교미술품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폴리뇨의 안젤라: 그리스도를 향한 광적인 사랑과 미술
40대 중반 여자가 성당에 들어섰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한 이미지를 보자 갑자기 
“알 수 없는 사랑이여, 왜? 왜? 왜?” 라고 소리치며 혼절하였다. 그리스도가 성 프란체스
코를 안고 있는 그림을 보며 자신도 안아달라고 외친 것이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십
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하다 갑자기 옷을 다 벗어 제치고 알몸으로 기도하
기 시작했다. 만약 눈앞에 이런 광경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뭐라 할까? 당연히 ‘미친 여자
네!’ ‘광신자네!’ 하며 고개를 돌릴 것이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아시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에도 그녀를 미쳤다고 경계하며 다시는 아시지에 오지 말라고 경고하였다고 한다. 아
시지에서 17Km 떨어진 폴리뇨Foligno에 살던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Terz’Ordine 
Francescano) 소속의 안젤라 이야기이다. 그러나 거의 광적인 그녀의 행동은 예수와의 
일치, 예수의 고통에 몰입하는 참회로 해석되었다. 그녀의 참회와 영성적 비전(vision)은 
당시에도 유명하여 복자 때론 성녀로 불렸다(그림1). 공식적으로는 1709년 교황 클레멘
테 XIII 세에 의해 복자에 오르고, 2013년 프란체스코 교황에 의해 성녀로 시성되었다. 그
녀의 사후 704년 만이다.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 소속의 안젤라 
잠시 그녀의 생애를 알아보고 미술과 관계된 이야기로 들어가기로 하자. 폴리뇨의 안젤라
는 다른 성녀들에 비해 일반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아마도 시성이 늦었기 때문
에 관련된 행사나 기념물, 제단화 등의 미술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안젤라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작은 도시 폴리뇨Foligno에서 낳고 살았으며 그곳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에 묻혔다. 그녀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참회과정을 기록한 책들이 전해지
고 있다. 이에 미루어 보면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아마도 20살 즈음에 결혼했으며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85년 경 그녀의 나이 37세 쯤 남편과 아이들,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다. 가난을 실천하고자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
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1290~91년 경, 42~43세에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에 입회하였
다. 속세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재속수도회이다. 그녀는 속세에서의 삶에 대하여 극
한적인 참회생활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신비한 비전을 경험하였다
(도2). 이러한 특성으로 과부와 성적유혹에 관련된 수호성인이 되었다. 현대의 우리로서
는 상상할 수 없는 종교수행이었지만 중세 여성의 실화이다.


‘그려진 십자가croce dipinta'와 안젤라의 비전
이제 그의 이야기 중 미술과 관련된 부분으로 자세히 들어가 보자. 안젤라의 영적 체험에
는 종교미술품이 자주 등장하여 당시 종교미술품과 이를 보는 사람과의 정서적인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의 한 장면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던 중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길을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 이 인식을 통해 나의 죄를 알게 되었고, 이는 극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만 같았다. --- 십자가 옆에 서 있다가 나는 내 옷을 모
두 벗어버리고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다.” 

아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하면 되지 왜 옷까지 벗어던졌을까? 더구나 
여자가 옷을 벗는 행위는 에로행위인데, 성당 안에서 감히 옷을 벗다니! 그러나 그녀 행위
의 동기는 에로티즘과 관계가 없었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
셨듯이 자신도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예수의 뜻을 따르고자 함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나는 십자가의 길을 찾게 되었다. 다른 모든 죄인들이 십자가 발아래서 안식처를 찾듯이 
나도 십자가 발아래 서 있었다. … 내가 만약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나를 좀 더 가
볍게 하기 위해서 발가벗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내 자신 옷을 벗어버렸다. 속세의 모든 
것, 남자와 여자의 모든 애착, 나의 친구들과 친척들, 다른 모든 이들, 내 모든 소유물 그
리고 내 자신까지를 벗어버리고자 하였다.”

십자가의 길, 지금의 우리에겐 단지 외우는 기도문이 되었지만 안젤라에게는 온 몸을 다 
바치는 길이었다. 그녀가 옷을 벗은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없앤다는 의미였다. 당연
히 주변의 험담이 이어졌다. 그녀는 자기를 “불편해하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했다.” 
그리고 이 행위가 있은 지 얼마 후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아하던 머리 
장식들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말한다. “이 시기에 나는 아직 남편과 살고 있었는
데, 나를 향한 모든 중상모략, 불공정함을 참아내기가 정말 혹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견뎌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지났다.”고.
안젤라는 십자가 상이 화가나 조각가가 만들어서 세운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안젤라
에게 십자가상은 실제의 예수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몸으로 반응이 
왔다. “그리스도의 수난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열이 나서 쓰
러지고 아파서 눕게 되었다. 결국 내 동료는 수난 그림들을 감추었으며 내 눈에 보이지 않
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안젤라가 구체적으로 어느 십자가 상 앞에서 기도하였는지
는 정확하지 않지만 13세기 말 아시지와 폴리뇨가 속한 움브리아 지방에서 제작된 유형들
은 알 수 있다(그림5-8). 
13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조각보다 그림으로 그려진 십자가가 많이 사용되었다. 십자형의 
나무 패널에 템페라 채색으로 그린 이른바 ‘채색된 십자가croce dipinta, painted cross’
이다. 그런데 이 그려진 십자가도 12세기의 십자가와 13세기 말의 십자가는 완연히 다른 
유형을 보여준다. 12세기의 십자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만 눈을 크게 뜨고 그
냥 팔을 벌리고 있는 상이었다(그림 3, 4). 물론 기술이 부족해서 고통을 표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십자가에 매달렸으나 바로 그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부활한 ‘승리의 예수’를 
상징하는 도상방법이었다. 13세기에 ‘고통받는 예수’로 변한 것은 아시지의 성 프란체스
코(San Francesco d'Assisi: 1181/1182 – 1226)와 직접 연관이 있다. 
프란체스코가 신앙에 몰두하기 시작한 1206년에 다미아노의 암자에서 십자가의 예수와 
직접 대화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시지에 순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인 산 다
미아노에 지금도 걸려있는 ‘채색된 십자가’가 프란체스코와 대화한 바로 그 십자가라고 
전해지고 있다(도3, 4).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승리한, 전지전능한 예수보다 고통의 예수
와 함께 하기를 기도했다. 그가 강조하던 예수의 고통은 새로운 십자가 상을 요구했다. 그
리고 13세기 중엽 이후 ‘고통받는 예수’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그림 5). 예수의 발아
래서 프란체스코가 못에 박혀 피흘리는 예수의 발을 바라보는 상도 만들어졌다(그림 6, 
7). 상징적이고 평면적이던 중세 미술이 13세기 중엽 이후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변한 
것은 화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당시 종교의 요구에 의한 화가의 대응이었음
을 알 수 있다. 13세기 후반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지역에 고통의 십자가
상이 더욱 많은 이유는 이 지역에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프란
체스코 제3수도회 소속의 안젤라는 당연히 이러한 유형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안젤라는 그림으로 그려진 고통의 정도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안젤라는 “십
자가는 너의 구원이며 너의 침대이다.”라고 말하며 십자가 형태로 바닥에 눕곤 하였다. 그
러면서 “사람들이 십자가 옆을 그리 빨리, 잠깐 멈추지도 않고 지나가다니 정말 놀랍다.”
라고 불평한다. 당시의 십자가 상에도 불만이었다. “그 이후 나는 채색 십자가croce 
dipinta나 고통의 예수상 옆을 지나갈 때마다 십자가에 묘사된 상이 내가 보고, 내 심장에 
각인된, 실제 있었던 예수의 극심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이유
로 나는 더 이상 이 상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십자가 그림에 고통을 더욱 
더 강하게 묘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만약 내 영혼을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 십자가에서 신선한 피가 흘러내리
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채색 십자가도 있다. 아레쪼의 성 프
란체스코 교회 십자가이다. 작은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에서 프란체스코는 피가 철철 흐
르는 예수의 발을 자기의 팔로 감싸고 있다(그림8). 당시 십자가에 안젤라의 모습은 그려
지지 않았으나 프란체스코 생전에 여성 수도회를 이끈 키아라(Chiara d'Assisi; 1194 – 
1253)가 피흘리는 예수의 발을 안고 있는 모습은 그려졌다(그림9). 안젤라는 고통의 참회
를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교리와 함께 널리 퍼져있던 이러한 유형의 십자가들을 이미 보았
을 것이며 그녀의 비전은 이에 빙의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안젤라가 요구하듯이 이러한 
유형이 점점 더 많이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안아주겠다.”
안젤라는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에 입회한 1290~91년 경, 그녀 나이 42~43세에 성 프란체
스코의 성지인 아시지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폴리뇨에서 17km 정도의 거리였으며, 몇 명
의 동료들과 동행하였다. 가는 도중 그녀는 “나는 네가 프란체스코 성당에 다다를 때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네 안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이를 눈치재지 못할 것이다.”라는 그
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아시지에 도착하여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들어섰을 때 
일어난 일이다. 

“성당에 들어가 입구에서 무릎을 꿇은 후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그리스도가 성 프란체
스코를 가까이 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음성을 들었다. “이제 나는 너를 가
까이,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안아주겠다. 나의 달콤한 딸, 나의 신전
이며 나의 기쁨인 딸아, 이제 네게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나는 이제 네게서 이 위안
을 거두겠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를 절대로 떠나지는 않겠다. … 그가 
떠난 후 나는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직도 알 수 없는 사랑이
여, 왜 나를 떠나십니까?” 나는 내가 소리 지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 말 밖에 생각
나지 않았다. “아직도 알 수 없는 사랑이여, 왜? 왜? 왜?” 더구나 이 외침이 내 목에 걸려 
말소리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하느님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는 의심
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 이 경험 후 내 몸의 모든 관절들이 탈구되는 느낌이었다.”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과 그리스도가 프란
체스코를 안고 있는 모습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그림 10, 11). 지금은 이 성당의 벽화인 
지오토의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 시리즈가 더 유명하지만 1290-91년의 일화이니 벽화
가 그려지기 전 스테인드글라스만 있을 때였다. 안젤라 글을 앞 뒤 문맥에서 이해하면 ‘프
란체스코는 그렇게 안아주면서 왜 나는 안아주지 않느냐?’는 시기심에 찬 사랑의 갈구였
다. 소리를 지르고 혼절하여 모든 관절들이 탈구되는 느낌이었다니, 스테인드글라스의 이
미지에 온 몸으로 반응한 것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주변을 고려하지 않고 벌어진 일에 
동료들은 당황하였고, 그녀의 고백수사이며 그녀의 비전을 기록한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
속의 수사 아르날도Arnaldo는 동료들에게 다시는 그녀를 아시지에 데리고 오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이 비전의 경험은 그녀에게 많은 보상을 안겨주었다. 아시지에서 돌아
온 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러운 달콤함을 맛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여
드레 동안이나 누워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너는 지금 내 사랑의 반지를 끼고 있
다. 이제 너는 나와 약혼한 사이이며 너는 이제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
었다. 이는 고통과 참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영성적 체험이 생각으로만 이루어지기보다 감각과 몸으로 매개되는 프란체스
코 수도회의 수행방법을 반영하고 있다. 

성 금요일, 그리스도와 함께 관에 눕다
그리스도교가 생활의 중심이던 중세엔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 연극 등 모든 예술분야가 
그리스도교를 위한 행사였다. 성 금요일 예수가 돌아가신 날의 미사는 그 중에서도 성대
한 종합예술이었다. 실제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을 재현하고, 십자가에 걸어 놓았던 ‘고
통의 예수상’을 내려서 나무 관에 넣었다. 이탈리아 중북부에는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
서 내림>을 나타낸 조각상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페샤Pescia의 산 안토니오 조각에
는 예수의 몸에 아직도 밧줄이 걸쳐있다(그림12). 예수 부분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과정에
서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밧줄이다. 아래 일화는 성 금요일에 이러한 미사극을 바라보면
서 겪은 안젤라의 비전경험이다. 

“성 금요일, 엑스타지 상태에 있을 때 그녀는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관에 누워있다는 것
을 알았다. ……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입
에 입맞춤하고는 그 달콤함을 어찌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잠시 뒤 그녀가 그녀의 뺨
을 그리스도의 뺨에 대니 그리스도도 자기의 뺨을 그녀에게 대고, 손은 그녀의 다른 쪽 뺨
에 대고는 더 가까이 꼭 안아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
다. “내가 무덤에 묻히기 전에 내가 너를 이렇게 꼭 안아주겠다.” 그리스도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녀는 또한 그가 눈을 감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무덤에 누워있는 것
을 보았다. 그녀의 기쁨은 무한히 컸으며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성 금요일 미사에서 행해진, 그리스도의 시신을 관에 눕히는 장면에서 안젤라는 자신도 
함께 관에 누워있는 비전을 경험한 것이다. 아시지의 성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생애를 말
로만 듣는 것을 넘어 실제 눈 앞에서 보고 만질 수 있기를 원했다. 오늘날 우리가 성탄절
에 말구유를 만들어놓고 아기예수를 눕히는 전통도 프란체스코가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의 영성을 마음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감각으로 느끼기를 원한 결과이다. 프란체
스코 수도회 소속인 안젤라는 이러한 전통을 뼈 속 깊이 체험하고 있었다. 
예술의 세계가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상위예술과 저급한 예술로 나뉜 19세기 이후 같은 
종교미술품도 회화나 조각은 순수미술의 대접을 받았지만 미사에 쓰이던 성구들은 공예
로 취급받았다. 값비싼 금속은 그나마 남아있지만 나무로 만든 관은 거의 다 없어졌다. 스
위스의 노트르담 수녀원에서 이러한 용도로 쓰이던 관이 남아있으니 다행이며 이를 통해 
안젤라가 경험한 비전의 한 부분을 실감할 수 있다(그림13). 성 금요일 미사에서 목조의 
예수 시신을 관에 넣는 장면을 바라보며 안젤라는 자신도 관에 들어가 비좁은 공간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안아주는 상상의 비전을 경험했을 것이다. 눈앞에 보는 광경과 마음속
의 상상을 넘나드는, 아니, 경계가 없는 비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이미지와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만남
일반 역사에서도 중세가 암흑기라는, 참으로 비역사적인 편견이 남아있지만 미술사에서
도 중세미술에 대한 평가는 실로 박하다. 같은 종교미술이라도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
의 <피에타>상은 지고한 예술품으로 숭상하는 반면 중세의 <피에타>상은 도외시 하곤 
한다. 르네상스기의 작품은 작가의 창작품으로 여기는 반면 중세미술은 종교의 도구로 취
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엔 예술의 효용론도 한 몫 했다.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 ;  540년 경 – 604)가 ‘미술은 문맹인을 위한 성경’이라는 논거를 댄 이후, 흔히 
중세의 종교미술은 성경의 일화를 설명하는 삽화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는 교회를 
미술로 장식하는데 대한 찬반논의가 일었을 때 미술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였지 그것이 효
용 전체는 아니었다. 우리가 위에서 자세히 살펴본 안젤라의 체험들은 그 반대의 예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상은 예수의 고통을 일화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으며, 이를 보는 사람 또한 감정이 고조된다. 
안젤라의 일화를 상기하면서 종교미술과 보는 이의 정서적 대화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글의 앞에서 보았듯이 안젤라는 참회를 하면서 혼자 방에 있을 때가 아니라 이미지를 보
면서 비전체험을 한다. 즉 미술이 영성을 촉발시키는 현상이다. 물론 같은 십자가라도 어
떤 사람은 그 앞을 그냥 지나치고 아무런 영성도 전달받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보
면 이 영성은 작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보는 이의 마음속에 이미 준비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상이나 스테인드글라스의 이미지를 보았을 때 비전을 경험한다는 사
실은 마음속에 준비되어있는 영성 또는 정서가 실재하는 미술 이미지를 매개로 발현됨을 
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이미지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이미지가 만나는 순
간이다. 보이지 않는 개념이 물질적인 형상을 봄으로 해서 구체화되는 현상일 것이다. 
미술품은 마음의 이미지를 밖으로 꺼내 촉발시킬 뿐만 아니라 과정을 진행시키기도 한
다. 안젤라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겠다
고 결정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프란체스코를 안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사랑
의 갈구가 촉발되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얻는다. 
또한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이미지가 보이는 미술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안젤라는 십자가
에 묘사된 예수의 고통이 자기 심장에 각인된 예수의 극심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
니라며 더 이상 이 그려진 십자가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예수의 고통을 더 강하게 묘사
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13세기 후반 십자가상을 제작하면서 화가들은 예수
의 고통을 더욱 실감나게 강조하였다. 
비전(환시)과 종교미술품은 둘 다 형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비전은 자기 마음 
속에서만 보일 뿐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형상인 반면, 미술품은 남의 눈에도 보이는 구
체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비전임에도 불구하고 눈
에 보이는 형상을 매개로 발현되고, 전개되고, 또 미술이 비전대로 구체화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눈에 보이는 물질만이 실재함을 증거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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